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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림나오' (μεριμνάω) - 염려하다 (worry) 본문

단어풀이/히브리어/헬라어 단어 풀이

'메림나오' (μεριμνάω) - 염려하다 (worry)

frog prince 2016. 1. 10. 14:23

신약성경에서 주로 “염려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메림나오’가 있다. 이 단어를 가지고 희안한 해석을 하는 설교가들이 너무나 많다. 이는 “염려하다”라는 단어가 나오는 곳마다 자주 듣는 해석인데 정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 염려하다”를 영어단어로 “worry” 라고 하면서 그 영어단어의 어원적 의미를 찾는데, 이는 “목을 졸라 죽인다”는 고대 앵글 색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동사형인 ‘메림나오’는 “나눈다” 또는 “쪼개어진다”를 뜻하는 동사 ‘메리조’와 “마음”을 뜻하는 ‘누스’의 합성어라고 한다.

이러한 단어풀이를 근거로 염려는 살인적인 것이라느니 사람의 목숨을 단축시킨는 무서운 적이라는 성서본문과 상관없는 매우 주관적인 해석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는 왜 이러한 해석들이 잘못된것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영어단어인 “worry”의 어원적 의미를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것 처럼 헬라어 ‘메림나오’의 어원적 의미와 영어의 어원적 의미가 같지 않고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성서저자들이 ‘메림나오’라는 단어를 생각했을때 “목을 졸라 죽인다”라는 의미를 떠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아니라 “worry”의 어원적의미는 위에서와 달리 “목을 졸라 죽인다”이다가 아니라 “목을 조르다”이다. “죽인다”라는것은 목을 조르는 것의 결과의 하나일 뿐 이다. 또한 “worry”라는 단어는 의미적 변형을 거쳤는데, 1600년 후에는 어원적의미가 사라지고 “annoy” (짜증나게 하다), “bother” (귀찮게 하다), “vex” (성가시게 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1822년 이후로는 “mental distress” (정신적 고통), “feeling of anxiety” (불안한 느낌)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에는 어원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그 단어가 성서번역 당시 어떠한 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였졌는가가 중요한것이다. 그것은 바로 역본가들은 헬라어 단어의 의미와 가장 적합한 의미를 지닌 그 시대의 단어로 번역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처럼 영어단어의 어원적 의미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 단어를 사용한 저자들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될 수 있기에 그러한 방법은 적합하지 않다. 이것에 대한 예로 ‘awful” 이라는 단어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단어는 원래 “경의로움을 고무하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또는 “위엄이 가득한” 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었지만, 현대에서는 지배적으로 “끔직한”, “지독한” 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단어 사용의 진화에 의한 의미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대 번역가나 저자가 사용한 단어를 어원적의미를 가지고 이해하려는 것은 그 단어를 내포한 문장의 의미를 왜곡하게 만드는 것이며 문제이다. 따라서 현대 영어성경의 단어에 어원적 의미를 부여해서 이해하려는 것은 잘못된 해석 방법이다.
 
2. ‘메림나오’는 영어로 “to worry”라는 단어로만 번역되지 않고, “to think” (생각하다), “to be anxious” (불안하다, 걱정하다), “to be concerned” (신경쓰다), “to care” (돌보다) 이라는 여러 단어들로 번역이 되어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worry”라는 단어로만 이해하고 그 단어의 어원적의미만을 추적하는가? 한국어로 번역된 ‘메림나오’의 단어들만 제대로 찾아봤더라도 그 의미의 다양성을 알 수 있지 않는가? 나는 왜 영어로 단어풀이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특히 그 다양하게 번역된 단어중 하나만 골라서 풀이를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3. 헬라어 단어인 동사 ‘메림나오’ (μεριμνάω) 는 ‘메리조’ (μερίζω)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단어가 ‘메리조’와 ‘누스’ (νοῦς) 와의 합성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이는 그 어느 헬라어 렉시콘을 찾아봐도 ‘메림나오’가 ‘메리조’ 와 ‘누스’의 합성어라고 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어쩌면 ‘메림나오’의 헬라어 문자 ‘누’ (ν) 는 “정신”을 뜻하는 ‘누스’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단어가 변하면서 ‘누스’의 다른 부분들을 잃고 단 ‘누’만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 그렇다고 가정하자면, 헬라어에 ‘누’가 들어간 다른 모든 단어들도 ‘누스’와의 합성어로서의 가능성을 따지고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가?
 
클래식 헬라어에서 사용된 ‘누스’의 합성어를 보면 ‘누스’라는 단어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어 사용되는데, "이해없이"를 뜻하는 형용사 '아누스' (ἄνους/ἄνοος), "어리석은"을 뜻하는 명사 '아노이아' (ἄνοια), "무분별한" 혹은 “어리석은”을 뜻하는 ‘에크누스’ (ἔκνοος) 와 “실성한”을 뜻하는 ‘파라누스’ (παράνοος) 등이 있다. 이 단어들은 “정신”을 뜻하는 ‘누스’ (νοῦς, νοός) 와 부정 접두사로 사용되는 결성사 (privative) ‘알파’ (ἄ-) 그리고 전치사 (ἔκ-, παρά-) 와의 합성어이다. 이 합성어에서 인지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은 바로 ‘누스’라는 단어의 모형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림나’와 ‘메림나오’에서는 ‘누스’가 유지된 모형을 절대로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누’ (ν) 나 '나' (νά)가 '누스'에서 근원했다는 학적인 주장을 아직 읽지 못했다. (도서관에 가본지 오래되었다.) 만약 그런 주장이 있다면 내게 알려주면 감사하겠다. 그리고 설령 ‘누’나 '나'가 ‘누스’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누스'는 그 형태를 이미 잃어버린 상태로 단어의 발전과정에 의해 그 혼합된 두 단어들의 개개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연스럽게 1세기 당시의 사전적 의미로 발전하게 된것이다 라고 보면 될것이다. 또한, 이는 성서저자들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것이 아니라 당시대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사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사용한 단어들은 구약적 배경을 제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원적 의미가 아닌 배경적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
 
이제는 ‘메림나오’가 ‘메리조’와 ‘누스’의 합성어라고 가정을 해보자. 그러면, 왜 이것이 꼭 그 두 단어의 합성어이어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메림나’의 ‘메리’ (μερι) 를  ‘메리조’ (μερίζω) 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음나’ (μνά) 를 “기념” 혹은 “기억”을 뜻하는 ‘므네모수네이’ (μνημοσύνη) 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인가? 따라서, 하나님이 이전에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의 문제에 빠져 근심하는 것이 ‘메림나’라는 설명은 않되는 것인가? 물론, ‘메림나’가 ‘메리조’와 ‘므네모수네이’의 합성어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한 특정 문자를 가지고 아무런 학적 근거없이 추측만을 가지고 그것을 특정 단어들과의 합성어의 근거를 삼는것은 그단어의 의미를 이미 주관적으로 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적이고 무의미한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합성어적 단어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영어로 “새끼/어린 돼지”는 ‘피그렛’ (piglet) 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고 ‘피그’가 “돼지”를 뜻하기에 ‘렛’은 “새끼”를 뜻한다며, 그것을 근거로 ‘블렛’ (bullet) 이라는 단어는 “황소”를 뜻하는 ‘블’ (bull) 과 ‘렛’ (let) 의 합성어로서 그 단어는 “새끼/어린 황소” 를 뜻한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영어를 안다면 그것이 얼마나 황당한 해석인지를 알것이다. 왜냐하며 ‘블렛’은 “새끼/어린 황소”가 아니라 “총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원에 숨겨있는 깊은 의미를 밝혀낸답시고 이런식으로 언어를 풀이한다는 것은 정말 우습기 짝이 없다. 그러나 헬라어의 특정 문자들을 그런식으로 푸는 분들이 하는것이 이러한 해석과 별 차이가 없다. 제발, 목회자들은 이런 코메디는 코미디언들에게 맞기고, 학교에서 배운데로 연구를 열심히 그리고 제대로 했으면 한다.
 
4. 이제는 ‘메림나오’가 사용된 구절 몇개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의 한글성경은 모두 다 개역개정이다.)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많은 설교가들이 주로 이 구절을 가지고 ‘메림나오’가 “정신이 나누임” 또는 “마음이 나누임”을 뜻한다고 한다. 물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생각이 여러가지 일들로 나뉘어진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구절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과 대조해서 말씀 하신것을 생각할때, 이 구절의 가르침은 세상적인것에 신경쓰지말고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메림나오’는 여러것에 대해 마음이나 생각이 나누이는 것을 말한다는 것 보다는 육적으로 필요한것들에 얽매여 신경쓰지 말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7:32-34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2절에는 “염려 없다”로 번역된 형용사 ‘아메림누스’ (ἀμερίμνους: ἀμέριμνος 의 대격 남성형 복수형태) 와 “염려하다”로 번역된 ‘메림나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만]을 염려하여”라고 하는데, 이는 그 염려가 이리저리 나뉘어진 마음의 염려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하고자 하는 한 목적에 사로잡힌 마음쓰는것 (메림나오) 을 뜻한다. 34절에서도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되”라고 하는데, 이 역시 나뉘어진 마음의 염려가 아니라 한 마음으로 주님의 기쁨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는 ‘메림나오’가 나뉘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염려하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매우 좋은 사례이다. 가령 “주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라는 염려가 여러가지 길을 생각한다는 차원에서 정신 혹은 마음의 나누임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마음의 나누임 자체를 꼭 부정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며 혹 그렇다고 하면, 이는 생각과 연관된 모든것을 나누인 마음으로 봐야한다는 문제를 낳게 된다. 또한 34절에 “마음이 갈라지며”를 뜻하는 단어는 ‘메림나오’가 아니라 ‘메메리스타이’ (μεμέρισται; ‘메리조’의 완료형 직설법 수동태 3인칭 단수) 이다. 이는 ‘메림나오’가 ‘메리조’에서 유래했을지라도 단어의 발전과정을 통해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사전적 의미를 지니게 된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메림나오’는 “돌보게 하셨느니라”라고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might have concern”, “should have concern/care” 로 번역이 되었다. 또한 “서로 (ἀλλήλων) 같이” (τὸ αὐτὸ) 라는 문구를 사용함으로서 ‘메림나오’가 나누어진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돌보는 것을 뜻하고 있다. 혹 “서로” 또는 “같이”을 빼더라도 이곳에서는 ‘메림나오’가 절대로 “나누인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뿐아니라 이 구절에서 “분쟁”으로 사용된 단어는 ‘스키스마’ (σχίσμα) 인데, ‘메림나오’는 그 반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는 ‘메림나오’가 절대로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음과 뜻이 합해진것을 나타내고 있다.
 
빌립보서 2: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이 구절에서 ‘메림나오’는 “생각할”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그 앞에 나오는 “뜻을 같이하여”라는 문구를 보건데 ‘메림나오’에 “나뉘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빌립보서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구절에서 “염려하다”라는 것은 정신이 나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걱정이라는 것이 항상 마음이 이리저리 나누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걱정이 한가지 문제에 집중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 알 수 있다.
 
위에 있는 구절들에서 알 수 있는것은, ‘메림나오’는 꼭 “마음이 나누임”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를 뜻하기도 하며, 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 단어가 부정적인 차원에서 “염려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차원에서 “마음쓰다”, “돌보다”, “보살피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염려하다”로 번역된 ‘메림나오’가 꼭 파괴적인것이나 불안정적인 상태나 무의미한 것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건설적이거나 안정되고 의미가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메림나오’를 부정적인 차원에서의 단어로 몰아가거나 그것이 마음의 나누임이라는 한가지 해석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로 그 단어가 사용된 사례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데서 발생한 오류인 것이며, 또한 미국과 한국의 유명한 목사들의 잘못된 단어풀이와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무분별하게 인용함에서 비롯된것으로 추측이 된다.
 
4. 헬라어에는 정신이 나누인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는데, 야고보서 1:8 에서 사용된 형용사 ‘디프쑤코스’ (δίψυχος) 이다. 이 ‘디프쑤코스’/‘딮쉬코스’야 말로 “두번”을 뜻하는 ‘디스’ (δίς) 와 “혼” 혹은 “생명”을 뜻하는 ‘프쑤케’/‘푸쉬케’ (ψυχή) 의 복합어이며, 야고보서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과 세상 두 곳으로 나뉘는 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를 가지고 “나누인 마음”을 설명하지 않고 엉뚱하게 ‘메림나오’를 가지고 그러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 황당한것은 ‘메림나오’를 합성어로 설명하는 분들 중 야고보서의 “두 마음”을 ‘메림나오’로 오해를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추측컨데, 이것은 바로 그들이 원어 성경을 보며 본문을 분석하고 해석을 한것이 아니라 스트롱원어코드사전만 의지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결론적으로, ‘메림나오’는 ‘메리조’와 ‘누스’의 합성어가 아니며, 이것을 영어 단어 “worry” 의 어원적의미로 해석을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