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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패션(compassion)은 컴(com)과 패션(passion)의 합성어? 본문
설교를 듣다보면 많은 목회자들이 푸는 영어 단어 중 하나가 ‘컴패션’ (compassion) 이다. 이들은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신 단어는 영어로 ‘컴패션’ 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함께하다”를 뜻하는 라틴어의 ‘컴’(com) 과 ‘고통’을 뜻하는 ‘패션’ (passion) 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라며, 예수님은 우리를 단지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함께 하신다” 또는 “함께 아파 하신다” 라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풀이를 하는 설교와 간증과 글들을 인터넷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도데체 어디서 이런 풀이를 줏어듣고 사용하는지 궁금하며 또 왜 이렇게 영어 단어의 의미를 추적하려고 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원래 “불쌍히 여기사”로 번역된 단어의 의미를 연구하려면 당연히 원문에 있는 원어 단어를 연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신약성서에서 영어로 “compassion”으로 번역된 단어가 다섯개나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된 (마, 막, 눅, 롬, 고전, 고후, 빌, 딤전, 벧전, 유) ‘엘레에오’ (ἐλεέω), 공간복음에서만 사용된 (마 9:36, 14:14, 15:32, 18:27, 20:34; 막 1:41, 6:34, 8:2, 9:22; 눅7:13, 10:33, 15:20) ‘스플란크니조마이’ (σπλαγχνίζομαι), 히브리서에서만 사용된 ‘숨/심파테오’ (συμπαθέω) 와 ‘메트리오파테오’ (μετριοπαθέω), 그리고 로마서에서만 (9:15) 사용된 ‘오이크테이로’ (οἰκτείρω) 가 있다. 이단어들은 “to have compassion” 이라는 공통적인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다섯 단어 중 ‘메트리오파테오’ (μετριοπαθέω) 는 “적당한” 을 뜻하는 ‘메트리오스’ (μετριος) 와 “고난”, “감정” , “욕망”, “열정”, 어떤 상황 또는 조건 또는 환경의 “상태”, 그리고 좋거나 나쁜 “경험” 이나 “사건” 을 뜻하는 ‘파토스’ (πάθος) 의 합성어이다. 그러나 ‘메트리오파테오’는 ‘적당한’을 의미하는 ‘메트리오스’와 ‘파테오’의 합성어 이기에 ‘컴패션’의 어원적 풀이에 근거한 의미와 맞지 않다. 오히려 ‘파토스’라는 어원적 형태를 지니고 있는 ‘숨/심파테오’ (미국식 학적 발음은 ‘숨’ 현대 그리스 발음은 ‘심’) 에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컴패션’의 어원적 의미는 오히려 신약에서 히브리서 10:34에만 나오는 ‘숨/심파테오’에 적합하지 않을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감옥에 같혀 고통을 받는것 처럼, 그의 편지를 받아 읽는 사람들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을 함께하다” 라는 “컴패션”의 어원적 의미와 ‘숨/심파테오’의 사전적 의미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는 영어가 아니기에 영어 단어 ‘컴패션’의 합성어로서의 어원적 의미를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 방법이다. 그 이유는 바로 영어 단어의 뜻이 원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어의 의미가 번역된 단어의 선택과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나머지 세 단어들은 ‘파토스’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오이크테이로’는 여러 역본에서 ‘컴패션’으로 번역되었는데, 문맥상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선택/구원을 뜻하는 차원에서의 '컴패션'이기에 “고통에 함께하다” 라는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
목회자들이 공간복음을 설교하면서 “불쌍히 여기사”를 “고통과 함께하다” (컴패션) 라고 설명하는 단어는 ‘숨/심파테오’ 나 ‘메트리오파테오’가 아닌 ‘엘레에오’ 와 ‘스플란크니조마이’이다. 이중 ‘엘레에오’는 주로 ‘자비’를 뜻하는 영어 ‘mercy’로 번역이 된다. ‘스플란크니조마이’는 여러 역본에서 ‘컴패션’으로 번역이 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구별 못하고 무조건 영어 역본을 가지고 어원적의미를 따지는 목회자들도 있지만, 적어도 이 두 단어들의 차이를 알기에 원어의 의미에 따라 영어인 ‘컴패션’이 가장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하기에 영어단어의 어원적 의미를 따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그러면, 문제는 과연 ‘스플란크니조마이’는 “고통과 함께하다’를 의미하느냐 이다.
첫째, 영어 ‘컴패션’의 영어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공통적으로 “배고프거나 아프거나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의미를 추적할 때 그 단어가 “함께”와 “고통”이라는 라틴 합성어 (‘compassionem’: ‘com’ 과 ‘pati’) 임에도 불구하고, 단어의 발전 과정을 통해 두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따른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상태를 설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컴패션’만이 아니라 다른 영어 단어들도 그런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영어 단어의 어원을 추적하여, 번역 당시의 사전적 의미를 무시한체, 어원의 문자적 의미를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스플란크니조마이’는 영어 ‘컴패션’의 합성어로서의 어원적 의미와 절대로 연관 시킬 수 있는 그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다만 영어 역본 번역가들은 당시 사전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단어들 중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단어로서 ‘컴패션’을 선택한것 뿐이다. 그 선택한 단어가 적합한 단어라고 해서 영어단어의 어원적의미를 원어단어의 어원적의미로 혼동하는 것은 언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발상한 착오이다,
셋째, 문맥을 살펴보면 ‘컴패션’의 어원적 의미가 적합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마 9:36을 보면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고통과 함께”하신것이 아니라, 그들을 시각적으로 보시고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신 것이다. 만약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셨다고 한다면, 예수님 자신을 병들어 아픈자로 만드셨어야 그가 진정으로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마 14:14 (막 6:34) 도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마음의 상태이며 그것이 병자를 고치시는 행위로 이어진 것이지 실제로 자신이 병자가 되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신것이 아니다. 마 15:32 (막8:2) 에서는 예수님도 실제로 배가 고프셨을 터이니 그가 사람들의 배고픔에 실제로 동참하셨다는 해석이 유일하게 가한 구절들이다. 마 15:32 은 주인과 빚진자에 대한 이야기로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준 사건이다. 여기서 돈 많은 주인이 빚진자의 고통에 동참할 수 없었을 것이고, 다만 애처롭게 은혜를 구하는 빚진자에 대한 불쌍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마 20:33에서 눈을 뜨고 계신 예수님이 맹인의 고통에 동참하실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고, 다만 두 눈이 떠져 보이기를 원하여 예수님께 큰소리로 절망속에서 희망을 구하여 부르짖는 모습을 보시고 그를 향해 불쌍한 마음을 가지신 것이다. 막 9:22 에는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호소이다. 여기서 그 아버지의 말은 자신들의 고통에 함께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사” 혹은 자신들의 괴로움을 이해하시고 더 이상 이러한 고통스런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구해달라는 것이다. 눅 7:13은 독신 남성이신 예수님이 독자를 잃은 과부의 고통에 동참하실 수 없으셨다. 다만, 그의 아픔을 마음으로 이해하셨다는 것이다. 눅 10:33 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인데, 그가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속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눅 15:20에는 돌아온 탕자를 본 아버지가 그를 “측은히 여겨”라는 것은 그 아들의 고통에 함께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아팠다는 것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불쌍히 여긴 것이다. 이 구절들을 살펴 볼 때 알 수 있는 것은: 1) “불쌍히 여기다”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돕기 위해 마음이 움직였다 혹은 마음이 아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2) 불쌍히 여겨야 될자들을 마음으로만 불쌍히 여기신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도움과 치유와 구원이라는 행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구절들에서 중요한 것은 “컴패션”이라는 한 단어의 어원적 의미나 그것의 원어적 의미가 아니라, 문맥적으로 그러한 마음을 품고 행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컴패션’의 어원적 의미를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치유하시고 먹이셨어야 하신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들처럼 아프고 눈멀고 배고프게 만들어 그들과 함께 고통속에서 신음하셨어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의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가지신 한계에 의해 (‘컴패션’의 어원적 의미라는 차원에서) 다른이들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실 수 없으셨다. 다만,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고 그들을 고통으로 부터 자유케 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고통에 민감한 그의 마음이 움직였고 그에 따라 치유, 자유, 구원이라는 역사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듯이 ‘컴패션’의 어원적 의미인 “고통과 함께하다” 라는 것은 “불쌍히 여기다” 와 다른 뜻을 가진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것이며 고통받는자에 대한 이해로서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뜻한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과 함께하셨다” 라는 어원적 해석은 “불쌍히 여기사”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다시 언급하지만, 영어나 원어나 무조건 어원적 의미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두 단어가 합쳐졌을때 그것이 시대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문맥이 그 뜻을 좌우하는 것이다.
나는 도데체 미국의 어느 목사가 이런 풀이를 시작했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국교회와 미국의 한인교회의 목회자들은 이런 엉터리 풀이를 그대로 따라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성도들도 이러한 해석을 깊이있는 해석인것처럼 옮기거나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말았으면 한다. 제발 검증되지 않고 의문적인 것을 무분별하게 따라하지 말고 이성적인 비판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함으로서 한국/한인교회의 목회자로서의 자존심을 지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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