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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풀이/영어단어 풀이

예배/경배하다 와 워십 (worship)

frog prince 2015. 8. 2. 11:08

어떤 교회에는 찬양을 인도하는 음악/예배 목사님들이 계시는데 이분들이 즐겨 풀이를 하는 단어가예배’/’경배 뜻하는 영어워쉽’/‘워십’ (worship) 이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도 설교를 하며예배’/’경배라는 단어를 영어로 풀이하는 것을 자주 있다.  그들은 영어워십워스십’ (worth-ship) 에서 유래했다면서 하나님은 우리의예배’/’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해석이 매우 불편하다.

 

우선, 모두가 이해하는 좋은 한국어를 놓고 일부러 영어 단어를 들먹이면서 단어의 의미를 풀려고 하는 것인가? 한국어 보다 영어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많이 숨겨져 있거나 내포되어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영어 단어들이 정확한 번역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하는 것인가? 설교 준비를 제대로 못해 그런 풀이로 때우려는 것인가? 진정 그것이 잘못된 풀이인지 인식을 못하는 것인가? 예배’/‘경배라는 단어는 한자로 번역을 하지 않는 것인가? 물론 한자로 번역을 하면 새롭고 깊은 뜻을 찾을 있다 말이 아니다.

 

온라인 어원 사전 보면워십 앵글어로 ‘worðscip’, ‘wurðscip’그리고 웨스트 색슨 방언으로 ‘weorðscipe’으로서가치있다 뜻하는워디’ (worthy) 가치라는 뜻의워스’ (worth) ’/’’ (ship) 합해진워스십 맞다. 문제는 바로 그래서 어쨋냐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단어인 대한 어원은 추적을 하지 않으며, ‘ 어원을 추적해서 들어간 단어를 모두 어원적 의미로 풀고 이해해야 하는가 라고 묻고 싶다. 그러면 정말 황당한 영어 해석들이 나올것이다. 어쨋건, 이처럼 어원을 추적해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이유를 그것이 밝혀주느냐 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예배’/’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고 이러한 풀이가 어떤 새롭고 깊은 의미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것은 바로 원문을 영어로 번역한 성서번역가들이 과연워십이라는 단어의 어원과 다른 모든 단어들의 어원을 일일이 따지며 단어들을 선택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언어를 번역해본 분들은 알겠지만 그렇게 번역하지 않고 오히려 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이해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로 번역을 한다. 어원적 의미에 대한 추적은 바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단어의 의미를 좀더 정확히 알고자 하기 위한 방법이지 그것 자체가 그단어의 발전과 시대에 따른 사전적 의미와 다르다거나 깊은 의미를 더해주지 않는다. 따라서워십 대한 어원적 의미를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영어 단어보다는 원어의 의미를 추적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구약성경은 다니엘서를 제외한 나머지는엎드려 절하다라는 의미의솨카 사용하고 다니엘서는 갈대아어 혹은 아람어인엎드리다라는 뜻의세기드 사용한다. 신약성경에서는무릎을 꿇다라는 뜻의프로스쿠네오높이다라는 뜻의세보마이시중들다혹은경배하다 뜻의래트류오경의또는영광이라는 뜻의 명사인독사자진해서 드리는 경배라는 뜻의 명사인에텔로트레스케이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원어의 의미를 추적했을때에도예배’/’경배 하는 형식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진정한예배’/’경배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지 않다.  따라서 원어의 의미를 파헤치거나 특히 번역된 영어 단어의 어원을 추적해서예배’/’경배 대한 의미를 캐내겠다는 것은 헛된 수고일 뿐이다.

 

예배’/’경배 대한 옳바른 이해는 영어나 한국어나 심지어는 원어의 단어의 뜻을 추적하는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나 단락 그리고 성경에서의 이야기/설교/대화/가르침 (discourse) 에서 발견하는 것이며 성경전체에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하는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연구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자신의 연구결과에 대한 비판을 잃어서는 않된다고 생각된다. 물론 성도님들은 잘못된 단어 풀이에 대한 해석을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깊고 괭장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앵무새처럼 다른 성도님들에게도 전할것이다.

 

성경의 깊이는 단어 풀이에 의한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과 전체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할때, 그리고 이해를 인생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체험을 할때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말씀에 대한 연구와 신앙의 연륜의 중요성에 대해 나이가 드신 목회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것은 예외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적 지식이 많고 신앙의 연륜이 있어도 실수를 있고 그런 실수를 인식하지 못할 있다. 나이가 드셔서 은퇴를 코앞에 두거나 이미 은퇴하신 70-90세의 목회자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이민 초기의 목회현장이라는 전쟁터에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셔서 오늘의 그나마 성숙한 이민교회와 목회자들이 존재할 있게 만드신 분들이기 때문이며 치열한 목회속에서 제대로 성경연구를 시간이 없으셨고 요즘 젊은 목회자들이 쉽게 접할 있는 연구자료들을 접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분들의 실수는 은혜로 받아들이면 된다. 문제는 스스로 지적이라고 자부하고 연구를 하는것 처럼 폼을 잡으면서 쉬운 방법으로 성도들을 감동시키려는 젊은 목회자들이다. 물론 그들의 실수도 이해를 해주되 자주 번복해서   경우에는 지적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분들도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고칠것이 아니겠는가? 바뻐서 쉬운 방법을 택하는 목회자들도 있을것이다. 거기에 대한것은 그들을 바쁘게 해서 쉬운길을 택하게 하는 교회/성도들도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