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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2-3 - '오이다' 와 '기노스코' 본문

단어풀이/히브리어/헬라어 단어 풀이

요한복음 17:2-3 - '오이다' 와 '기노스코'

frog prince 2015. 7. 17. 00:08

최근에 고00 목사라는 분의 설교를 한국 어느 대형교회 웹사이트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다. 설교본문은 요한복음 17:2-3 이었다. 설교를 듣고 나니 좀 답답한 부분이 있어서 혹시나 다른 설교도 이런식으로 하는것이 아닌가 하고 그가 시무하는 미국에 있는 교회 웹사이트를 통해 그의 설교 두편을 더 들어 보았는데, 역시나 이었다. 나는 고 목사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의 설교 세편을 통해 고 목사는 복음과 선교에 대한 열정도 있고 진실된 목회자로 느꼈다. 그러나 원어 사용에서의 문제가 있고, 이것은 고 목사뿐만 아니라 명 설교가들과 신학교수를 하는 목사들을 포함한 수 많은 목회자들의 문제이기에 그를 희생양으로 삼는것이니 이해를 바란다. 

요한복음 17장 2절에서 3절은 아래와 같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고 목사는 3절에 “아는”이라는 단어에 대해 원어를 언급한다. 헬라어에는 “아는”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두개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오이다’와 ‘기노스코’이다. 여기서 그는 “‘오이다’ 는 누구에 대해서, 무엇에 대해서 아는 것이예요…기노스코는 누구를 아는 것이고 무엇을 아는 것이예요. 즉 관계를 통해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기노스코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동침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야다’는 헬라어로 ‘기노스코’로 번역되었다며, 3절에서 “안다”는 ‘기노스코’이며, 이것은 관계적인것 이라고 한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오이다’는 지적으로 아는 것이고 ‘기노스코’는 관계적이라며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고 목사의 두 단어에 대한 구분은 클래식 헬라어에서의 구분이며, 실제로 구체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질문해야 할것은 바로 요한복음의 저자도 그 두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를 따지며 구분하는가 이다. 우선 그 단어들이 들어 있는 구절들을 살펴보자. (모두 다 개역개정이다.)

  • (요 8:55) 너희는 그를 알지(기노스코) 못하되 나는 아노니(오이다) 만일 내가 알지(오이다)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오이다)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 (요 8: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오이다)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오이다)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오이다)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오이다).
  •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오이다)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기노스코).
  •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오이다)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 (요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기노스코)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오이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기노스코) 또 보았느니라.
  •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기노스코)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오이다)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요한복음의 저자는 두 단어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교환해서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두 단어에 대한 구체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분들 중 헬라어에 대해 무지하면서, 헬라어의 두 단어는 다 같으며 전혀 다른 차이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두 단어는 분명히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가 적용되는가 않되는가는 바로 문맥에 의해 좌우된다. 요한복음에서는 문맥상 그러한 구분이 전혀없다.
 
그러면 왜 요한복음의 저자는 두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동의어로 교환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단어 사용에 있어서, 세계 모든 언어에는 단어들의 의미가 곂치는 부분들이 있다. 이것은 단어에 어떤 구체적인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용되는 단어들 사이에 의미가 서로 곂치거나 중복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영어로 예를 들자면: car, auto, automobile, and vehicle; bear and carry; tired, exhausted, and drained; 등등. 한국어에 대해서는 내 한국어 실력이 딸리고 단어도 부족해서 잘 모르겠지만: 옳다 와 바르다; 잘못하다 와 실수하다; 등등. 이처럼 요한복음의 저자는 두 단어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미세한 차이의 의미보다는 서로 공통된 의미에 관심이 있으며, 이것은 그의 글쓰기 방식이다. 이것이 그의 글쓰는 방식이라는 것은 바로 ‘오이다’ 와 ‘기노스코’ 만이 아닌 다른 단어들도 그렇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휘사전적 의미에 집중해서 단어들의 미세한 차이를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렇기에 3절에서 “아는”이라는 것은 ‘오이다’ 와 구분된 관계적인 “아는”것이 아닌 다만 보편적인 “안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