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ἔντιμος - 엔티모스는 명예로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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ἔντιμος - 엔티모스는 명예로운?

frog prince 2021. 1. 26. 05:57

홍신해만이라는 신학생의 글을 뉴스조이에서 읽었다 (이곳). 그는 마태복음 8:5-13 나오는 백부장에 대한 이야기를 퀴어 비평으로 재해석한 글을 인용하면서 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파이스 근거로 백부장은 동성애자였으며, 그의 동성애 파트너를 예수님이 치료하심으로서 동성애를 용납하시는 예수님이라는 해석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글의 내용은 게이/퀴어 웹사이트에 올라온 글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글에 담긴 수정주의적 (revisionist) 해석은 이미 역사 비평학적으로 성경을 접근하는 복음주의적 성서학자들을 포함한 자유주의,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그리고 동성애자 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discredit  해석이다. 다만, 성서를 역사 비평학적으로 접근하지않고 포스트-모던 해석을 하는,  경험에 근거해서 접근하는 소수의 학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목사들에게서만 이러한 재해석이 가능할 뿐이다. 이것은 바로 동성애를 지지하는 학자들 역시 신약과 구약은 동성애에 대해 절대적으로 부정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바른 해석학적 방법으로 성경을 가지고 동성애를 정당화할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동성애를 지지하면서도 학자로서의 양심이 있는 학자들은 (목사나 신학생들이 아닌) 성경을 멋대로 재해석을 하여 새로운 소설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적용에 있어서의 신앙인들의 모순과 역사속에서의 휴머니즘 혹은 인간의 경험에 호소를 하고 있거나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홍신해만의 글에 대한 신현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의 훌륭한 반론이 있지만 (이곳),  나름대로 몇가지를  보태어 보고자 한다.

 

1. 백부장은 과연 로마 군인이었는가?

백부장이라고 불리우는 단어는 라틴어로 켄투리오’ (centurio)이며이며 헬라어로는 켄투리온’/‘켄튀리온’ (κεντυρίων)으로 음역을 하기도 했고, 신약에서는 헥카톤탈코스’ (ἑκατόνταρχος) 로 번역하고 있다. 백부장은 원래 로마군대의 장교의 계급으로서 백명 정도의 군인을 인솔하는자를 가르킨다 (실제로는 백명 이하 또는  이상일  있다.). 이러한 지식을 근거로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목사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은 백부장을 무조건 로마군인으로 간주하게 되는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사건은 유대땅이 아닌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던 갈릴리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데니스 배인 새딩톤 (Denis Baine Saddington) 연구 마태복음 8:5-13 백부장” (The Centurion in Matthew 8:5-13)에 의하면 로마군단 (레기온)  로마시민들로만 구성이 되었고, 주후 1세기에 유대땅에 주둔했던 군인들은 로마군단이 아니라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들로 구성된 보조군 (auxilia) 이었다(auxilia)이었다.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군단이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점령 한때가 주전 30년도이며 (Antiquities 15.71.73), 팔레스타인 지역에 주둔했던 군인들은  지역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가이사라 마리티마와 세바스테에서 모집했다” (Mark A. Chancey, Greco-Roman Culture and the Galilee of Jesus 49).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2에서 다루기로 한다. 또한 백부장이라는 계급은 로마군에만 있던 것이 아니다. 새딩톤에 의하면 나바타인들의 아라비아 (Nabataen Arabia)에도 로마군과 흡사하게 천부장과 백부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에 로마의 통치를 받던 지역의 군대들은 분명히 로마군대를 보기로 삼았고 모방했다고 한다. 헤롯 안티파스의 군대에도 역시 로마군대처럼 백부장과 천부장이라는 계급을 지닌 장교급의 군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안티파스가 통치하는 지역에는 로마군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Chancey 53). 물론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는 왕국들이 내부적 또는 외부적 위협에 처해 있을때에는 로마군이 보내진 경우가  가끔식 있었으나,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 안티파스가 통치하던 가버나움에서는  아무런 심각한 군사적이나 정치적 위협이 전혀 없었고, 따라서 로마군이 주둔할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Chancey 54). 그렇기에 마태복음 8장과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절대로 로마군단이나 로마보조군에 속한 군인이 아니라 헤롯 안티파스의 보조군의 백부장이다.

 

2. 모든 로마 군인들은 소년들을 상대로 동성애를 했다는 전제는 과연 옳은 것인가?

2.1  대부분의 로마 군인들이동성애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군에 대한 정책이 동성애를 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책은 바로 결혼 금지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새딩톤은 세라 엘리스  (Sara Elise Phang)의의 연구 (The Marriage of Roman Soldiers (13 B.C.-A.D. 235))  바탕으로  결혼 금지령은 로마시민으로 구성된 로마군단 (레기오) 에게만 적용된 것이라고 한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유대땅에 주둔한 군은 로마군단이 아니라 주로  로마시민으로 구성된 보조군이었고 (Phang 의하면, 로마시민들 역시 보조병에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갈릴리에 주둔한 군사들은 헤롯 안티파스의 군사들이었기에 로마군단에게만 내려진 결혼 금지령이 적용이 되지 않았다. 또한, 로마군단에게만 내려진 결혼 금지령은 결혼 자체를 막은것이 아니라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며, 이것은 로마 상속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군단에 속해있는 군인의 자식은 합법적인 자식이   없기에 상속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인들은 비합법적인 결혼 혹은 동거를 통해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아 길렀다. 물론, 이러한 금지령 때문에 동성애를 지향하는 로마군단에 속한 군인들의 수가 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마군단에는 그들을 따라다니는 매춘부들이 있었는데, 베르너 크렌켈 (Werner A. Krenkel) 은Appian, Hispanica 14.85; Livy, Periochae 57; Frontinus, Strategemata 4.1.1.1; Valerius Maximus, Factorum et dictorum memorabilium 2.7.1; Plutarch, Regum et imperatorum apophthegmata 201b  근거로 로마군단을 따르던 매춘녀들이 (Phang  동의하지 않지만) 수천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Phang 247; Krenkel, “Prostitution” in Civilization of the Ancient Mediterranean: Greece and Rome, vol. 2. 1294). 또한 로마군인들에게는 부리던 여종들이 있었는데, 그들과의 성적관계가 없었다고   없다. 실제로 그들이 주둔하던 숙사에서 여자들의 빗과 장식품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군인들이 여자들과 이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을   있으며 (Phang 248), 로마군인들이 운영하던 매춘굴이 발견된것을 감안할때 (Phang 248; Dura Reports 9.1, 166-167), 동성애보다는 이성애가  일반적이었다고 봐야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군단에 속한 군인이라고 해서  동성애를 했을것이라고 추정할  없다. 또한 이러한 로마군단의 상황  결혼 금지령과 동성애/동성행위 허용이라는 그들의 문화를 헤롯 안티파스의 군대에 적용할  없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의 종의 병을 고쳐주기를 간청한 백부장에게 적용할  없는 것이다.

2.2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의 동성애/동성행위에 관한 부분들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것처럼 1세기에 적용하려는 것은 그와 다른 견해들을 침묵시키는 행위이다. 사실 고대, 클래식, 그리고 1세기 문학을 살펴보면 동성애를 미화하는 이야기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자연적 또는 비정상적이라며 질타하는 도덕가들의 글들 또한 찾아볼  있다 (Michael Bird, Sexegesis; Preston Splinkle, People to be Loved). 주전 5세기와 4세기의 풀라토는 남자와 남자 그리고 여자와 여자와의 동성행위에 대해 자연[질서] 어긋나는것 (παρά φύσιν)”이라고이라고 하며, 그레데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비정상적인] 쾌감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법을 준다고 믿는 제우스와 가니메데와의 동성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하고 있다 (Laws 1.636). 주전 1세기의 (60 B.C. – 30 B.C.)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 (Diodorus Siculus)는는 사미아데스 (Samiades) 자웅동체자 (hermaphrodite)  그의 아내 헤라이스 (Heraïs)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사미아데스는  둘사이에서 정상적인 성적관계가 불가능하기에 동성애적 성관계를 했다는 것과 그러한 비정상적인/비자연적인 결혼 생활 탄로난것에 대해 수치심 느껴 후에 디오판투스라는 남성명으로 개명한 헤라이스에게 전재산을 남기고 자살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Bibliotheca Historica 32.10); 주전 1세기의 (60 B.C. – 7 B.C.) 로마시대의 그리스 역사가 디오니시우스 (Dionysius of Halicarnassus) 삼니욱 전쟁 (Samnite War)  로만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가이우스 라에토리우스가 자신의 음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년에게 강압적으로 동성행위를  사건을 기록하면서,  수치스러운 행동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진영에 퍼졌으며, 그것은 국가전체에 대한 범법행위로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를 정죄했고,  죄에 대한 댓가는 사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Antiquitates Romane 16.4.3); 주전 43년에서 주후 17/18년까지 살았던 오비드 (Publius Ovidius Naso) 이피스 (Iphis)  이안테 (Ianthe)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안테는 이피스가 남자인줄 알고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어 결국에 이안테는 이피스와의 혼인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피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괴로워하며자신과 이안테가 육체적으로 합해지는것에 대해 그러나 자연은 원하지 않는다” (at non vult natura)라고라고 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여신 이시스 (Isis)의 도움으로 소년으로 변한 후에 이안테와 결혼을하게된다 (Metamorphoses 9.714-716, 764-797). 주전 4년에 태어나 주후 65년에 죽은 세네카 (Seneca)  동성행위에 대해 자연에 상반되는” (contra naturam) 것이라고 하고 있으며 (Moral Epistles to Lucilius 122.7); 주후 1세기에 살았던 (20-30 A.D. – 101 A.D.) 로마의 철학자 루푸스 (Gaius Musonius Rufus)는는 “방종하지 않고 부도덕적하지 않은자들은 결혼에서 이루어지는 성적행위만이 정당하다고 볼것이며볼 것이며,또한 그것의 목적은 자녀를 갖기 위함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On sexual indulgence 12.2); 주후 1세기의 (46 A.D. – 120 A.D.) 그리스의 역사가인 풀루타르크는 남자와 남자와의 성적행위는 자연에 상반되는 (παρὰ φύσιν) 것이다 라고 하면서,  반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정상적이며 자연적이다”라고 하고 있고,  나아가 남자가 남자에게 성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그것이 충동과   폭력이나 강앞적인 강간에 의해서이거나 혹은 자발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자연에 상반된 것이다”라고 함으로서 모든 동성행위를 자연질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정하고 있다 (Amoratorius 5). 2세기 말에서 3세기초의 그리스의 웅변가이며 문법가인 아테나에우스 (Athenaeus of Naucratis) 동성애/행위에 대해 비정상적/자연에 상반된 (παρά φύσιν)”이라고 하고 있으며(Deipnophists 13.84); 5세기의 로마 의사인 카엘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Caelius Aurelianus)가가 번역한 그리스의 유명한 의사였던 소리아누스 (Sorianus) 글에 의하면 동성행위는 경멸스럽고 역겨운 정신적 질병[고통]이다라고 하고 있다 (On Chronic Disease 4.9.132). 이것은 바로 그리스-로마시대에  도덕가들처럼 자연질서에 반대되는 행위를 비도덕적인것으로 보고, 자연질서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도덕 철학은  시대의 다수와 반대되는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기도 한다), 로마군단의 군인들 중에도 도덕적으로 살기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인정해야한다인정해야 한다.따라서 무조건 로마군단의 백부장은 동성애/동성행위를 했다는 전제는 잘못된 것이다.

 

3. ‘엔티모스’ (ἔντιμος): 명예로운

3.1  누가복음 7:2 7:2에나오는 엔티모스’ (ἔντιμος)라는 단어는 백부장이 자신의 종을 가르켜 부른 단어가 아니라 누가가 (그의 source  무엇인지 잘모르겠지만잘 모르겠지만)백부장의 종을 가리켜 부른 단어이다. 한글역본에서는 사랑하는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다.  단어가 사용된 모든 사례들을 살펴보면 주로 명예로운” (honored, honorable)라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높이 평가하는”/“귀중히 여기는” (valued highly)  가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절대로 동성애나 동성행위와연관되어 사용된 사례를 찾아볼  없다. 또한 누가복음을 제외하고는 파이스 함께 사용된 사례가 없다헬라어 신약사본과 구약 70인역에서도 두말할 나위도 없이 동성애와 연관되어 사용되지 않고, 고대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명예로운”, “존경스러운”, “귀중한”, “높이 평가하는”이라는 사전적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누가가 말하는 엔티모스 백부장에게 칭송을 받던 , 귀히 여김을 받던 , 혹은 능력있는 종을 뜻하는것이지 동성애와 무관한 것이다.

3.2  로마에서는 종과의 동성 행위가 문제가 되지 않은 반면에 자유인과의 동성애 행위는 문제가 되었는데, 동성적 관계에서의 수동적인 성적대상인 남성은 타락한 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특히, 자유인인 남자가 다른 남자의 성적대상이 된다는 것보다  수치스로운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주로 노예/종들이 성적대상이 되었으며, “그는 수치스로운 ‘파티쿠스’ (pathicus) [항문성교에 굴복하는 남자 ] 또는 키나에두스’ (cinaedus) [항문성교를 즐기는 수동적인 남자] 였으며, “진짜 남자의 정반대되는 놈으로 (creature) 표현되었다” (Phang, 278). 로마에는 자유인인 소년과의 성적관계를 처벌하는  (lex Scantinia)   있었는데,  법은 주인과 종과의 관계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종을 사람 취급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에게 동성행위를 강요받는 종은 놀림의 대상이 되었고 (Phang 267; Plautus, Pseudolus 1180-1), 자유인 사이에서의 동성애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파트너로서 복종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 역시 조롱당했다” (Craig Williams, Roman Homosexuality 5). 이것은 바로 동성행위적 관계에서 수동적인 파트너로서 강제로 동성 강간을 당하는 또는 주인의 성적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도구로 전락한 종의 수치스로운 상황은 명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히기에 반대되는 상황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들이다. 로마제국의 문화와 , 그리고 동성행위를 죄악시했던 1세기 유대교를 볼때볼 때,동성행위에서 수동적 파트너로서 성적해소의 대상인 종에 대해 명예로운 뜻하는 엔티모스라는 수식어를 붙혔다는 해석은 불가능하다.

 

4. 유대교와 예수님.

4.1  주후 1세기 유대교는 이혼에 대해 크게 힐렐 (Hillel)  솨마이/샤마이 (Shammai)  파의 해석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힐렐은 이혼에 대해 매우 가부장적이며 느슨한 견해를 가졌는데, 아내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발견하면 이혼을   있다고 보았다.  반대로 솨마이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지켰는데, 성적으로 부도덕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이혼은   없다는 것이었다. 중요한것은 바로  둘이 이혼에 대해 서로 다른 소리를 내었지만, 동성애에 대해서는  목소리로 죄라고 정죄했다는 것이다. 1세기의 로마-유태인 학자요 역사가인 요세푸스 (Josephus)  의하면 유대인들은 자연이 지정한  남자와 여자와의 결혼 그외에 어떠한 성적행위는 용납하지 않으며, 남자와 남자의 혼합을 혐오하며, 그것을 행하는자에게 주어지는 벌은 죽음이다 라고 하고 있다 (Against Apion 2.199). 주전 1세기와 주후 1세기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포킬리데스 위서 (Pseudo-Phocylides) 에서는 자연이 정해놓은 한계를 범법하는 성행위로 죄를 짖지말라짓지 말라” (192)라고 하고 있다. 주전 25년도와 주후 50년도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던 유대인 철학자 필로 (Philo)  소돔의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미쳐 간음을 행할뿐만 아니라 같은 남자를 향한 음욕으로 인해 서로 동성행위를 저질렀고 본성을 존중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On Abraham 135), 그러한 것은 용납할  없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36). 그는 또한 하나님이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소돔의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반율법적인[반 율법적인?]행위 매우 싫어하셔서 그들을 “소멸하셨다”라고 하고 있다(137). 1세기 말에세기말에 쓰여진 2에녹서 10 3절에는 지옥은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자들   땅에서 본성에 대항하는 죄를 짖는 자들…”이라고 하고 있다. 주전 2세기로 추정되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The Letter of Aristeas) 에는 그들 [남자들] 다른 남자들하고만 성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어머니들과 딸들도 더럽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죄로부터 우리를 지켰다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1세기 유대교의 동성행위에 대한 가르침과 자세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4.2  예수님은 이혼을   있는 사례에 대해 샤마이파보다도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셨는데, 이는 육적인 간음만이 간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짖는 간음도 간음이라고 정죄하신것인데정죄하신 것인데,율법을  어느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적용하신것이다적용하신 것이다. (산상수훈에서의 모든 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을  엄격하게 그리고 온전히 가르치셨다.) 그뿐 아니라 결혼에 대해 창세기를 바탕으로 결혼은 남자와 여자 한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서말씀하심으로써,창조질서에 위배되는  어떤것도 용납치 아니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동성애에 대해 직접적인 말씀이 없으셨기에 예수님은 동성애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성애뿐만아니라 소아애, 수간, 근친상간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런것들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교회는 그러한 것들을 성적취향의 차이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줘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1세기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성적 죄에 대해 엄격한 자세를 취하신것을 볼때볼 때, 1세기 유대인들이 동성애에 대해  알고 있었고 또한 바른 결혼에서의 성적행위외에 모든 성적탈선을 죄로 정죄한것을 염두에 둘때둘 때,그리고 율법을 페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세우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볼때볼 때, 예수님 역시 1세기 유대인으로서 유대장로들과 다르지 않게 동성애를 죄로 보았다는 것은 부인할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압도적인 입장이다.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창조질서에 근거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와 마음에 품은 생각  모든것을 죄로 보셨다고 봐야할 것이다. 특히 결혼은 굳히 남자와 여자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여 설명하신것이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결혼은  창조질서에 의해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구태여 그렇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강조한 이유는 1) 확실히는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강조하신것이며 2) 또한, 적게는, 이방인들의 동성혼인을 인식하여 하신 것으로도 추측이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예수님이나 백부장을 대신해서 그의 종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한 유대인들이 파이스 동성애인으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나, 다른 유대인들의 눈이 있음에도 유대장로들이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백부장의 동성애인을 고쳐달라고 했다는 해석은 앨리스가 있는 이상한 나라에서나 가능한 것이며, 예수님의 결혼에 대한 강조는, 성경은  파트너와의 관계 (monogamous relationship)를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현대 동성애 옹호자들의 주장이 성립될  없는 불가능한 주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5. 유대장로들의 간청

예수님께 나아온 유대인들은 백부장을 대신해서 이일을 [종을 구하는] 하시는 것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간청을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다른 속국들과 달리 로마제국의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를 지켜온 강한 신앙심을 보여줬다. 이처럼 고집스럽게 유일신을 믿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이방신들에 대해 배타적인 유대인들을 백부장이 사랑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의 문화화된 야훼신양 또한 사랑한것으로   있다. 특히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결혼에서의 성행위외에 다른 모든 성행위를 죄로 가르치는 회당을 지어줬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과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힘든 일이며, 적어도 문화화된 야훼신앙을 존중하고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자세를 볼때 (누가복음 18:11; 사도행전 10:28), 그들이 백부장을 대신해서 예수님께 청을 올린것은 바로 그가 유대교의 가르침을 존중했고 유대인들이 공감할 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대인들은 백부장에 대해서 잘알고 있었고, 그의 종에 대해서도 명예스러운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할 만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백부장이 동성애자였다면남자와 여자와의 결혼외의 모든 성적관계를 죄악시한 유대교의 장로들은 사무적인  외에 그와 전혀 상종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특히 그를 위해 예수께 간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6. ‘파이스’ (παῖς): 어린이, 자식, 소년, 소녀, 아들, , 

홍신해만은 파이스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다:

 

소년 혹은 아들’, ‘’, ‘하인’, 그리고 남자 주인이 사랑하는 남성 소년, 청년, 하인으로 사용된다. παῖς(파이스)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후자의 의미  '사랑하는 동성 연인'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유폴리스의 극작과 아테네 시인이었던 아이스키네스의 Against Timarchos>와 플라톤의 향연, 플루타르크의 Life of Pelopidas>를 예로   있겠다.”

 

6.1  내가 보기에는 홍신해만이 증빙자료로 제시한 고대문서들은 게이/퀴어 웹사이트에서 가져온것으로 보이는데,  자료들을 검증하지 않고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파이스’ (παῖς)는는 346 BC 쓰여진 아에스키네스의 “티마르코스를 대항하여 (Aeschines, Against Timarchos 39, 94, 139, 등)에서만 동성애/매춘이라는 문맥에서 사용되었고 (파이스, 파이다, 파이도스), 360 BC에에 쓰여진 플라톤의 “심포지움” (Plato, Symposium)에서도  단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파이스'의 다른 형태는 동성애/행위와 무관하게 사용되었다. (사용되었다면 어디에서 사용되었는지 가르쳐 주길 바란다). 431 B.C.  쓰여진 투키디데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사” (Thucydides, History of Peloponnesian War) 75 A.D. 에에 쓰여진 풀루타르크의 펠로피다스의 ” (Plutarch, Life of Pelopidas)에서도 역시 동성애와 연관된 사용이 발견되고 있지 않다: 펠로포네소스 전쟁사에서는 “…ἐν ᾗ Θεσσαλοῦ μὲν οὐδ᾿ Ἱππάρχου οὐδεὶς παῖς γέγραπται” [그것에 [폭군의 부당한 행위를 알리기위해 세운 기둥에] 테살루스나 히파르쿠스의 자식 (παῖς)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의 이름도] 새겨지지 않았다] (Thucydides, History of Peloponnesian War 6.55.1) 이며6.55.1)이며,동성관계와 무관하고; “펠로피다스의 에서는 “Οὗτος ἦν Φίλιππος ὁ τοῖς Ἕλλησιν ὕστερον πολεμήσας ὑπὲρ τῆς ἐλευθερίας, τότε δὲ παῖς ὢν ἐν Θήβαις παρὰ Παμμένει δίαιταν εἶχεν” [그는, 후에 그리스인들의 자유와 [그리스인들을 노예삼기위해노예 삼기 위해]전쟁을 , 필립이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소년 ((παῖς)이었고 팜메네스와 함께 테베스에 살았다] (Plutarch, Life of Pelopidas 26.5) 라고 쓰여져 있는데,  내용만을 가지고 테베스에 인질로 잡혀가서 파메네스의 집에 맡겨졌던 마케도니아의 왕자였던 필립이 동성애를  파메네스의 집에서 살았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동성애적 관계를 가졌다고 단정하기에 불충분하다. (번역에 실수가 있으면 누구든지 코멘트에 지적하기 바란다.)

6.2  홍신해만이 인용한 위의 글을 보면, ‘파이스’ (παῖς)가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동성 연인으로 사용된다고 하는데, 모든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는 일방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물론,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동성애적 문맥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동성 연인으로 사용된다는것이 아니라, 동성애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홍신해만의 파이스 대한 정의는 정확한 정의가 아니며,  단어를 동성애 연인이라는 의미로 몰아가고자 당시의 사전적 의미에 이질적인 (foreign)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있다.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5세기 B.C. - 4세기 B.C.) 사전적 의미는 아들과 딸을 포함한 자식이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고, 그다음으로는 남자 (소년) 여자 (소녀) 포함한 어린이라는 의미로, 그리고 나이 많고 적음이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 대한 구분이 없이 모두를 포함한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LSJ, παῖς). 이러한 의미는 헬라어 신약 사본 (1세기 A.D.~), 그리고 요세푸스의  (93/94 A.D.)에서도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는데, 이것은 파이스 동성애인 의미하지 않는 중요한 근거  하나이다.

6.3  홍신해만은 파이스라는 단어에 남자 주인이 사랑하는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데, 실제는 파이스라는 단어는 그러한 의미를 전혀 내포하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정의는 동성애 지지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기위한 의도적이며 비정직한 해석이다. (이것은 이미 게이/퀴어 웹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정의이다.) 고대와 클래식 그리스 문학 그리고 헬라어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는 ‘아가페토스’ (ἀγαπητός)이다.이다 ‘필로스’ (φίλος) 역시 사랑하는 뜻하는데, 고대와 클래식 그리스 문학에서 아가페토스 필로스 파이스 함께 동성애적으로 함께 사용된 사례를 발견하지 못했고 (혹시 그렇게 사용된 사례가 있다면 가르켜 주기를 바란다), 다만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사랑하는 아들 (παῖς ἀγαπητὸς)” (Homer, Odyssey 4.815); “사랑스런 아들 (παῖς ἀγαπητὸς)” (Demosthenes, Orations 21.165).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는 동성애적 관계에서 수동적인 상대에게 사랑하는 ” (정확히는 사랑을 받는자받는 자”) 뜻하는 남성 명사인 ‘에로메노스’ (ἐρώμενος)를를 사용했는데동성애적 관계에서 확실하게 12세에서 20세의 동성행위의 상대인 소년을 의미한다 (Flacelliere, Love in Ancient Greece 68). 그렇기에, 설상, 백부장의 종이 동성행위의 파트너였다면, 보편적으로 어린이”, “아들”, “”, “소년”, “소녀", 그리고 으로 이해하고 사용했던 폭넓은 의미의 파이스라는 단어보다는 구체적으로 애정 관계에서 사랑하는 ”/“사랑받는  뜻하는 ‘에로메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백부장이 자신의 종을 파이스 아닌 ‘‘에로메노스’라고 칭했어야만 예수님이 백부장과 그의 종과의 관계를 동성행위라는 차원에서 이해하셨을 것이고, 그래야만 동성행위/강간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셨다는 해석이 가능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백부장이 사용한 단어는 ‘에로메노스 아닌  뜻하는 파이스이며, 따라서 예수님이 동성행위/강간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셨다는 해석은 불가능하다.

6.4  홍신해만이 첫 번째로인용한 글은 케네스 제이 도버 (Kenneth J. Dover) 그리스 동성애” (Greek Homosexuality) 에서이다: “동성  사랑의 관계 속에서παῖς (파이스) 종종  자란 청년이었다” (16). 여기서 도버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파이스라는 단어는 동성  사랑의 관계라는 문맥에서 사용될때에만 주로 (often)  자란 청년 뜻했다는 것이며, ‘파이스 어린아이”, “소녀”, “아들”, “”, 그리고 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홍신해만은 도버의 글을 계속해서 인용한다: “에로스적 동성 간의 관계에 있는 나이 어린 파트너 παῖς(파이스) 어른만큼 성장하고 자라난 이를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그가 인용한  부분은 어린아이와의 성적관계라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파이스 의미를 성인 혹은 성장한 청년으로 인식시키기 위한것으로 보인다. 어쨋건어쨌건,도버의 글을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동성적 에로스에서의 나이 어린 파트너는 성인의 키만큼 자랗고 그의 얼굴에는 수염이 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이스’ (혹은, 물론, ‘파이디키아’)라고 불려졌다…” 여기서 도버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파이스라는 단어가 동성애라는 문맥속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의미인 어린아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동적인 [동성애적] 파트너는 많은 문맥에서 그리고 시에서 거의 변함없이 어린이’, ‘소녀’, ‘아들’, ‘’, 그리고 으로 사용된 단어 파이스, ‘소년’ (복수 파이데스),  지칭되었다” (16) 라고 앞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파이스 동성애인 뜻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과 종의 동성관계에서도 이라는 뜻을 유지하고 있는데, 다만  관계에서 소년/소녀  어린아이만을 뜻하지 않고 청년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인 것처럼,파이스 역시 동성애인 아니라 이다. 그럼에도 파이스 동성애 관계에서 동성애인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1) 도버의 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것이며못한 것이며, 2) ‘게이’ (gay)라는 단어가 원래는 명랑한 뜻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동성애자라는 의미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는 21세기의 상황을 1세기에서 파이스  뜻하는 의미와 혼동했기 때문이다.  파이스 모든 헬라어 사전에서 정의하는 대로 어린이”, “소년”, “소녀”, “아들”, “”, 그리고 ““종”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백부장이 설상 동성애자였다고 하더라도 유대장로들과 예수님은 파이스 동성애적 파트너로 이해할  없었다.

6.5  홍신해만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신약학자인 로버트 개그논 (Robert A. J. Gagnon)의의 저서 성경과 동성애적 행위” (The Bible and Homosexual Practice)에서의 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인용을 하고 있다: “παῖς(파이스) 동성애 관계 속에서 나이 어린 소년 파트너를 뜻하는 단어로도 사용되었고,  자란 성년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었다 (163).” 그러나 개그논은  문장에서 “could be used” (…사용될  도)라는 문구를 사용하는데, “‘소년’ (파이스)  동성애적 관계에서의 어떤 주니어 파트너는 물론 이미 성장한 사람에게 사용될   있다  조금더  문구의 의미를  나타내주지 않는가 라고 생각된다.  생각이다. (여기서 주니어” (junior)는는 동성애적 관계에서 수동적인 파트너를 뜻하는데 주로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다.) 어쨋건  부분은 각주에서 Scroggins 글과의 대화 내용인데, ‘파이스 동성애/동성행위라는 문맥에서만 나이 어린 소년 파트너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될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지  그렇다는 것이 아니며, 그는 파이스 백부장의 자녀 혹은 아들 보고 있다 (이곳)

6.6   파이스 동성애적 관계에서 사용한 글들은 위에서 이미 설명한대로 주로 아틱 혹은 클래식 헬라어로서 5세기 B.C. - 4세기 B.C.  쓰여졌으며 (7세기 B.C. – 6 세기 B.C.  고대 헬라 문학에서도 사용되고 있음) 아테네가 중심이된 헬라문화에서 이루어진 일이지 당시 존재하지도 않은 제국으로서의 로마의 문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또한, 적어도 3세기 반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주후 1세기에 사용된 공히 혹은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자식”, “아들/”, “소년/소녀 그리고 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단어가 1세기에서도 동성애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파이스 동성애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의미가 로마군인에게 무조건 적용된다는 생각이나 주장은 시대와 문화에 대한 착오에서 발생한 오류이며 억지이다. 백부장 그리고 1세기 갈릴리 지방에 있던 유대 장로들과 예수님과 성서저자들이 듣고 이해하고 말한 헬라어는 아틱/클래식이 아닌 코이네 헬라어이며, 그들 모두가 이해한 파이스 주전 5 - 4세기의 클래식 그리스 문학에서 사용한 동성애적 관계라는 문맥에서의 의미가 아닌, 1세기의 일반적 생활속에서의 사용하고 이해하던  이나 어린이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6.7  신약에서는 파이스라는 단어를 24 사용하고 있는데 , “남자아이”, 그리고 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예수님에게도 사용되고 있다 ( 12:18;  2:43). 이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의 정의와 다르지 않은것을   있는데, 신약  어디에서도 동성애/동성행위와 연관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구약 70인역에서는  외경을 포함해서 파이스 469번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문학과 다르지 않게 ”, “젊은이” , 그리고 어린아이 혹은 자식으로 사용되었으며,  역시 절대로 동성애라는 문맥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파이스 대한 신약과 구약의 사전적 의미에 익숙해있던 1세기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파이스 동성애인으로 이해했다는것은 어불성설이다.

 

7. ‘ 파이스 ’ (ὁ παῖς μου): 나의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사용된 문구  파이스 ” (ὁ παῖς μου)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는 풀루탈크의 모랄리아에서 스파르타의 영웅 브라시다의 어머니가 그에 대해 나의 아들이라고 칭하고 있고 (Lacaenarum Apophthegmata 1.1),  안티폰의 테트라로기아 에서도 역시 나의 아들”을 뜻하고 있으며 (Tetralogia 3 1.1; 3 3.9), 그외에 동성애와 연관되어 사용된 사례를 찾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에 그렇게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완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 70인역에서는 나의  (ὁ παῖς μου)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1:7 “나의  모세”;  20:3 “나의  이사야”; 42:1 “나의  야곱”;   52:13 “나의 ”; ‘παῖς μου’:  14:24 “나의  갈렙”;  1:7 “나의  모세”;  41:8, “나의 자녀 야곱”;  41:9 “너는 나의 자녀라”; 44:1, 2 “나의  야곱”; 44:21 “야곱… 나의 ”;  26:28 “나의 ”. 우선, 마태복음에서는 나의 아들이라는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마태복음 12:15에서의 사용을 볼때 나의 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고 본다. 누가는 백부장의 종에 대해 모든  뜻하는 둘로스 사용하기에 나의 아들이라는 해석보다는 나의   우월하다. (요한복음 5장의 사건을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사건과 같은 것으로 여기며 파이스 자녀라고 봐야한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학자들도 있음). 여기서 나의 이라고 사용된 문구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나의  1) 그의 주인의 뜻을 직접받아 행하는 자이며, 2) 주인을 대표하는 자이다. 이것은, 특히, 그를 “명예로운 노예라고 칭한것을 감안할 , 1) 백부장의 명을 직접받고 행하는  주인을 대표하는 종이었다는 해석에 힘을 실어주며; 2) 아마도 70 역에서의 파이스  익숙해 있던 유대장로들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쫒아다니던 무리들이 당시의 상황에서 나의 으로 이해를 했으며, 위에서의 여러 설명들과 함께 볼때볼 때,절대로 동성애적 관계에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8. 로마군인과 종의 동성행위의 실체.

홍신해만은 애인 그리고 사랑하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백부장과 그의 종의 관례를 미화하는데, 1세기 로마시대에서의 주인과 종의 동성행위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으며,  관계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나오는것처럼 애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로마군인과 그의 종과의 동성행위는 일방적인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강간이었다. 또한 종을 여성화하기위해 거세를 하는 일도 있었는데, 주후 81-96 황제였던 도미타누스에 의해 금지되었다 (Suetonius, Domitanus 7.1). 이러한 행위들이 상호간의 협의에 의해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강제로 행해졌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명심해야 한다.또한 여기에는 인격대 인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종은 주인의 명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물건 취급을 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무시하고 주인과 종의 동성행위를 미화하는 것은 로마제국에서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의 동성행위에 대한 지식 부족과 21세기 동성애라는 관점과 그리고 주전 7-6세기의 고대 그리스 문학 그리고 5-4세기의 그리스 클래식 문학에서의 동성애를 주후 1세기 로마시대에 적용하는 시대적착오에서 벌어진 오류이다. 또한, 예수님이 백부장과 종의 관계를 동성애적 관계로 이해했고 인정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강간을 허용한 악한자로 몰아가는 것이며, 그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를 만들어낸다.

 

9. 홍신해만은 그런데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라고 하면서 정복자인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인데도 자신을 낮추고 예수께 간청한것은 그의 하인이 사랑하는 연인이었다면 납득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는 문제가 많다. 1) 백부장이 로마군인이 아니기에 그러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입증했다. 2) 군대의 대장급이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는 일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현시대에도  많고 사회계급이 높은 신앙인이 세상적으로 별볼일이 없는 목사를 존중하는 것을 자주   있지 아니한가? 특히 유대백성  유대종교를 따르고 회당을 지어주는 신앙적/종교적 열심을 지닌자가 구약에서 선지자들만이 행했다는 기적보다   기적들을 행하며 권세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에게 자신을 낮췄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것이 아니다. 3) 과연 하인을 아꼈다는 이유가 백부장과 그의 하인이 동성애적 연인사이였다는 근거가 되는가? 그의 하인이 요셉처럼 능력있는 어린 종이었기에 아낄  없었던 것인가? 특히 적어도 유대종교에 호감을 가진 그가 구약에서 나오는,  노예된 자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인을 인격적으로 대했기에 엄청난 고통속에 있는 그의 종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을  수는 없던 것인가? 짐승을 구하기 위해서 도움도 청하는데,  고통속에 있는 사람을 위해 그럴 수는 없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  나이가 적은 요한을 사랑하시고 아끼신것처럼아끼신 것처럼,육적인 욕망을 철저히 배제한 사랑을 자신의 하인에게 베풀  없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신것을 인식한 그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의 영혼을 아끼는 것이 과연 동성애적 연인이어야만 가능한 것인가? 자신의 병든 종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을 부르던 조선시대의 괜찮은 양반들이나 아픈 노예들을 정성껏 치료해준 인간미를 풍기던 서양의 노예 주인들은 모두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며, 그들의 종들은 그들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육체적으로 사랑했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신것인가낮아지신 것인가?그것은 아니지 않은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사랑이나 동성이나 이성적 사랑을 뜻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그런 단순과 억지 논리로 백부장과 그의 하인을 동성애적 연인들로 몰아갈  없다. 4) 또한  중요한것은 바로 백부장이 예수님에게서 보통 사람들에게서   없는 권세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행할  없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이것은  그를 신으로 보았다기보다는 유대교에 대해  알고 있을 그로서 그러한 기적과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로 나와서 하나님의 종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며,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그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식한 것으로 봐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종에대한 비유를 사용해서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믿기에 그에게 업드려 자신의 종을 치유하시길 간청한것인데간청한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분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자세이다 ( 2:1-11; 3:13-14).

 

9. 위에서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백부장은 로마군인이 아니었으며, 헤롯 안티파스의 보조군사였다보조 군사였다; 2) 로마의 결혼금지법은 로마군단에게만 적용되었다; 4) 로마군인들이  동성애를 하지 않았다; 5) 로마제국에서의 주인과 종의 동성관계에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종의 위치는 수치스러운 것이며, 그들의 관계는 주인의 일방적인 강간으로 혹은 강압적인 동성행위에서 시작되었다; 6) “명예스러운 뜻하는 ‘엔티모스 주인과 종과의 동성관계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며,  단어는 백부장이 사용한것이 아니라 누가가 사용한 것이다; 7) 종을 뜻하는 파이스 동성애인 뜻하지 않으며 다만 아들/”, “어린이”, “소년/소녀 그리고 이라는 사전적의미를 계속해서 유지해 왔으며, 심지어는 동성애라는 문맥에서도  의미한다; 6) 백부장은 사랑하는  또는 애인 뜻하기도 하는 ‘에로메노스 사용하지 않고 파이스 사용했다; 5) 1세기에 살던 유대장로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파이스 절대로 동성애인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동성행위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는  죄라고 정죄했다.

 

10. 결론적으로, 백부장과 그의 종을 동성연인으로 몰아가고, 예수님이 동성애를 인정함은 물론 동성애를 행하는자를 칭송했다는 해석은 성립이   없는 억지 해석일 뿐이다. 결국에는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인데, 이것은 바로 인간의 경험에 따른 지식과 이해 그리고 성서가 말하는     무엇에 최종적인 권위를 두느냐의 문제이다. 무엇을  권위적으로 생각하던지 상관없이, 한가지 확실한 것은 바로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티모티 존슨은 나는, 우리가 동성의 결합은 거룩하고 선할  있다고 선언할때선언할 때,우리는, 사실상, 성서의 분명한 명령을  거부하며 대신  다른 권위에 호소를 한다는것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곳). 또한 이미 discredit  내용을 담은 책을 가지고 확신에  동성애를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는게 갑갑할 뿐이다. 이것은,  위더링톤이  월래스와 대렐 복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대화에서 예로 사용한것인데사용한 것인데,성경의 내용을 이런식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아브라함 링컨: 뱀파이어 헌터라는 각본을 쓰고 그것이 아브라함 링컨에 대한 진실이라고 믿고 주장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11. 마지막으로, 동성애자 딸을 두었고 동성애를 지지하는 미국 에모리대학에 있는 캔들러 신학원의  티모티 존슨 (Luke Timothy Johnson) 교수가 2007 66월 11일에 Commonweal  기재한 동성애와 교회: 성서와 경험”이라는 제목의 글을 모두에게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곳). 그는  글에서 신앙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경험을 바탕으로 동성애 문제를 접근하고자 하는데, 해석보다는 적용에 있어서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인간의 경험을 성서의 권위위에 두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진보와 보수 모두가 귀를 기울여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서해석에 있어서 지적 정직함 (intellectual honesty)  요구된다”라고 하면서 나는  언어 혹은 문화의 미세한 구별에 호소해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달리 말하게 하는것은 조금도 참을  없다. 해석의 상황은 분명하다 [바로 적혀있는 그대로이다]: 우리는 성서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라고  부분 그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읽고 이해하는데로 성경은 동성애적 행위를 정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학자의 양심이라는 것인데, 바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동성애 문제와 그외의 모든 것에 대해) 억지로 소설을 써가면서 변질시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되는 삶을 살거나 그러한 삶을 옹호하려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성경을 가지고 정당화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것은 보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근본주의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다.  근본주의라는 것은 극단적인  보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기위해 성서적 증거와 달리 극단적인 해석을 주장하는 자유주의나 진보들에게도 적용된다. 쉽게 설명하자면, 증거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바침해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고집부리는 것이 근본주의이며, 이러한 근본주의는 다루는 문제에 따라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존슨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정직함을 칭찬해 주고 싶고 그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이해해주고 싶다. (그를 이해해주고 싶다는  글에 태클을 거는 생각없는 근본주의적이며 몰상식한 사람들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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