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4Today!

정동수 번역 - 홀랜드의 킹제임스 성경의 영광? - 요한계시록 22장 19절 (1) 본문

킹제임스-온리파

정동수 번역 - 홀랜드의 킹제임스 성경의 영광? - 요한계시록 22장 19절 (1)

frog prince 2015. 10. 21. 11:26

(Proof-reading 을 귀찮아서 않하고 그냥 올립니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코멘트에 남기시길 바랍니다.)
 
참조 링크: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2
 
위에 있는 링크에 있는 글은 토마스 홀랜드의 “Crowned With Glory” 를 그 웹의 관리자가 번역한 것이다. 윗 링크의 글의 관건은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코덱스 1r 사본에는 요한계시록 22장의 16-21절이 없었기에 라틴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는 주장이 틀렸으며, 결론적으로 ‘생명의 나무’는 틀린것이며 ‘생명 책’이 옳다는 것이다.
 
첫째 문단과 둘째 문단, “이 구절의 초점이 ‘생명나무’가 아니라…” 와 “확실히 라틴 벌게이트와 그리스어 공인 본문은…”
홀랜드의 글의 둘째 문단을 보면,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을 라틴 불가타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비교하면서 그 둘은 전혀 다르다면서 에라스무스가 요한계시록 22:16-21을 라틴성경을 보고 헬라어로 번역한것이 아니다 라는 증거로 내세웠다. 그는 라틴불가타에는 ‘아멘 베니 도미네 예수’ (“amen veni Domine Iesu”) 곧 “아멘 주 예수님이여 오시옵소서” 이며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에는 ‘아멘 네/나이 에르쿠 키리에 예수 (“Amen. Nai, erchou, Kyrie Iesou”) 곧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에라스무스가 라틴어를 헬라어로 역번한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코덱스 1r 은 쿨트 알란드가 2814 으로 다시 번호를 매긴 미니스큘 사본으로서 코덱스 류클리니 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이것은 12세기 사본으로서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성경을 편집하는데 주로 사용했으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이 없어진 상태인데 바로 22장 16절 부터 21절까지 없는 단어들이 있다. 바로 이 없어진 부분을 에라스무스가 라틴어 성경을 헬라어로 역번역했다는 것이 학계에서는 충분한 증거에 의해 이미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 증거 중 하나는 바로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1516년에 첫 출판한 ‘신(새로운) 도구들’ (Novum Instrumentum) 에서 라틴불가타를 번역한데 대한 설명을 담은 ‘Annotationes’ 에서 분명히 라틴어를 역번역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 원문: Quamquam in calce huius libri nonnulla verba reperi apud nostros quae aberant in Graecis exemplaribus; ea tamen ex latinis adiecimus.
  • 영어직역: However, at the end of this book, I discovered several words in our writings that are absent in the Greek copies, however we added those from the Latin.
  • 한국어직역: 그러나 나는 이 책의 마지막에 우리의 저서(사본)들에는 있지만 헬라어 사본에는 없는 여러 단어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라틴어 사본으로부터 더했다.

에라스무스의 글을 설명하자면, “이 책의 마지막”은 요한계시록 22 장 16-21절을 뜻하며, “우리의 저서들” 과 “라틴어 사본들” 은 여러판의 불가타를 뜻하며, “헬라어 사본”은 그가 사용한 여러 사본 중 유일하게 요한계시록이 있는 1r 또는 2814를 뜻한다. 그는 헬라어 사본에는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여러 단어들이 없음을 설명하면서, 그는 그 없는 단어들을 라틴 불가타에서 가져와 자신의 헬라어 성경에 더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에라스무스가 라틴 불가타를 헬라어로 역번역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그의 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아니라, 학자들은 홀랜드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20절에 나오는 두번째 ‘에티암’에 대해서는 에라스무스가 라틴불가타를 역번역을 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다.  에라스무스의 1516 ‘노붐 인스트루멘툼’을 보면 (이곳) 왼쪽에는 헬라어 그리고 오른쪽에는 라틴어인것을 볼 수 있다. 오른쪽 밑에서 위로 넷째줄에서 부터 20절이 시작되어 밑에서 위로 둘째줄에서 끝나는데 ‘dicit qui testimonium perhibet istorum. Etiam venio cito. Amen. Etiam veni Domine Iesu. Amen’ 으로 되어 있으며, 헬라어 역시 왼쪽 밑에서 넷째줄에서 시작해서 밑에서 둘째줄에 끝나는데 ‘Λέγει ὁ μαρτυρῶν ταῦτα. Ναί, ἔρχομαι ταχύ, Ἀμήν. Ναί,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로 되어있다. 직역을 하자면 에라스무스의 헬라어는 “이 증거를 주신이가 말씀하시길, 그렇다, 나는 곧 (빨리) 올것이다 (Ναί, ἔρχομαι ταχύ). 아멘 (Ἀμήν). 그처럼 (혹은 “말씀하신데로” 혹은 “예” ) 오십시요, 주 예수님 (Ναί,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이며,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신약성경에도 역시 “이 증거를 주신이가 말씀하시길 (dicit qui testimonium perhibet istorum), 나는 곧/빨리 올것이다 (Etiam venio cito). 아멘 (Amen). 그처럼 (혹은 말씀하신데로) 오십시요, 주 예수님. (Etiam veni Domine Iesu) 아멘 (Amen).” 이다. 여기서 두번째 ‘에티암’은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하셨는데, 바로 “곧”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홀랜드가 지적하듯이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성경에는 “even so”, “also”, 또는 “yes” 를 뜻하는 ‘etiam’이 두번째 문구인 ‘veni Domine Iesu’ 앞에 더해졌지만, 라틴 불가타에는 두번째 ‘etiam’ 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라틴어인 ‘에티암’ (etiam) 또는 헬라어인 ‘네’/ ‘나이’ *(ναί) 는 어디서 온것일까? 여기서 홀랜드 는 바로 이 ‘에티암’은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헬라어 사본에 ‘ναί’ 로 되어있는 것을 증명하며, 따라서 에라스무스가 16절에서 21절을 라틴어를 헬라어로 역번역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설명한데로 에라스무스는 이 부분에 대해 명백하게 자신이 라틴 성경에서 헬라어로 역번역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번째 ‘etiam’에 대해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코덱스 류클리니를 발견한 프란즈 델리취는 그의Handschriftliche Funde (발견된 필기?) 57페이지에서 에라스무스가 로렌조 발라 (이탈리아: Lorenzo Valla; 라틴: Lorentius Vallensis) 의 Annotationes (이곳, 346 페이지) 에서 가져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독일어 번역을 수십년 만에 처음 해본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시라):

  • 원문: Seine ungennant Quelle sind hiebei Valla’s Adnotationes, welche mit den Worten schliessen: Graece non solum ante verbum venio est etiam: sed et ante verbum veni ναί ἔρχομαι ταχύ ἀμήν. ναί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Diesen Vers hat also ER. nicht übersetzt, sondern nach Valla’s Mittheilung und zwar, was ihm zur Ehre gereicht, mit dem nicht von der Vulgata, wohl aber gegen die Vulgata nach Laurentius handschriftlich bezeugten zsweiten nai aufgennomen, welches von da auch in Luthers Übersetzung übergegangen ist.
  • 영어직역: His unnamed source is hereby Valla's Adnotationes, which concludes with these words: In Greek, not only is etiam before the word venio: but also before the word veni: ναί ἔρχομαι ταχύ ἀμήν. ναί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Therefore, Erasmus has not translated, but from Vallas' Notes and in fact, to his credit, not with that from the Vulgate, but however contrary to the Vulgate as Lorenzo handwritten testified, incorporated second ναί, which also passed onto Luther's translation.
  • 한국어직역: 그가 명기하지 않은 출처는 바로 발라의 주석 (노트) 이며, [발라는] 다음과 같은 글로 맺고있다: “헬라어에는 결코 '에티암'이 '베니오'라는 단어 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베니'라는 단어 전에도 있다: ναί ἔρχομαι ταχύ ἀμήν. ναί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그렇기에 에라스무스는 [이 단어에 한해서] 라틴불가타를 번역한것이 아니라  발라의 노트에서 가져온것이며, 이는 라틴불가타와는 달리 로렌조의 기록이 증명한것처럼, 두번째ναί 를 더했는데, 이것은 루터의 역본에 그대로 옮겨졌다.

결론적으로 두번째ναί (etiam) 는 라틴불가타에서 역번역한 것이 아니라 발라가 헬라어 사본에 있다고 설명한 것을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헬라어 성경에 그대로 더한 것이다. 그러면, 발라가 말하는 헬라어 사본은 어떤것인가?
 

발라는 자신이 사용한 사본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두번째ναί   더한 사본 가장 오래된것은 주석을 포함한 uncial 051s    minuscule 82  로서 10세기 사본이며,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 miniscule 35 로서 11세기 사본이다. 따라서 두번째ναί 가장 빈약한 사본적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두번째 문구의 뜻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후에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셋째와 넷째 문단 은, 비교 자료로서 너무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기에, 이곳에: 
http://jesus4today.tistory.com/57
 
다섯째 문단: “이제 이것은 우리를 두번째 질문으로 인도한다…”
홀랜드는 에라스무스가 다른 헬라어 사본을 사용해서  두번째ναί 를 넣은것 같다며, 그는 호스키어를 인용하면서 사본 2049 는 에라스무스의 성경에서 발견된 본문은 물론 19절 또한 포함한다며, 사본 2067 역시 그 증거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바로 사본 2049 (호스키어 141) 은 16 세기 사본으로서 에라스무스의 1527년도의 넷째 출판을 손으로 베낀것이다. 사본 296 (호스키어 57) 한 16 세기 사본으로서 호스키어에 의하면 (Text, vol. 1, pg. 180) 콜리나에우스의 1534년판을 베낀것이라고 한다: Therefore Vergecius (Apoc. 57), who copied Colinaeus...So 57 becomes Colinaeus. 그는 또한 사본 57 혹은 296 의 reliability 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But whence did Colinaeus draw? 그러나 코리니우스는 도데체 어디서 가져온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No one knows. 그러나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We can surmise however. From nowhere! 그 어느것에서 부터 가져오지 않았다. That is from no MSS. direct. 곧 어떤 사본에서든지 직접 가져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Surely Colinaeus was not much better than Erasmus 확실한것은 코리나에우스는 에라스무스 보다 더 나은것이 없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실제로, 296 역시 출판본을 손으로 베낀 것이다. 결국에는 콜리아누스를 베낀 16세기 사본인 57/296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부족한, 신빙성이 없는 사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홀랜드의 주장은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성경이 출판되었을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의 넷째 판을 베낀 사본 2049를 사용했고, 역시 그의 성경이 출판된 후에 것인 콜리나에우스의 16세기 사본 (57/296) 을 근거로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헬라어 성경을 편집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또한 홀랜드가 자신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해 주로 인용하는 호스키어 역시 (Text, vol. 2, pg 156) "Negl. 57 et 141 ex ed. typ. exscripti." 곧 "사본 57 (296)과 141 (2049) 은 출판된것을 손으로 베낀것이니 무시하라"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홀랜드는 왜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이처럼 비정직한 행위를 일삼아도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사본 2067 에 대해서는 난외의 주에 (marginal note) 홀랜드가 주장하는 것이 적혀 있다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겠다 (그 사본의 사진을 찾아 볼 수 없어 확인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진에 있는 노트는 주로 사본 필사자들이나 누군가가 나중에 더한 것이기에 신빙성이 없다.
 
여섯째 와 일곱째 문단: “또한 부가적으로…” 와 “또한 요한계시록 22장 16-21절에서…”
다시 언급하지만, 홀랜드는 “에라스무스가 필사한 그리스어 본문은 공인 본문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과 일관성을 반영한다” 며 “이것은 그 구절들이 [16-21] 다른 그리스어 사본들로부터 필사되었으며” 라고 주장하는데, 문제는 바로 그 공인 본문들이 에라스무스의 1516년도의 성경 후에 나온 것들로서 후에 “공인 본문”으로 이름을 붙혀 출판한 것을 수정한 것들이다. 그러니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공인 본문들을 가지고 증거로 삼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
 
홀랜드는 16절에서  ‘다윗’이 에라스무스에서는 ‘τοῦ δαβίδ’ 로 비평본문에서는 ‘Δαυίδ’ 로 서로 다르게 기록된것과 17절에서 에라스무스에서는 ‘ἔλθε’ 로 비평본문에서는 ‘ἔρχου’로 그 역시 서로 다르게 기록된것을 언급하며 그것을 철자의 문제로 삼으면서 그것이 바로 에라스무스는 라틴어를 역번역한 것이 아니라 헬라어 사본을 사용한 것이라는 증거다 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설명했듯이 그가 사용한 사본들이라고 제시한 사본들이 그의 헬라어 성경이 이미 출판된 후에 나온것들이기에 이러한 것들은 그의 주장을 뒷바침할 증거가 되지 못한다. 특히 더 오래된 비잔틴 사본들을 보면 오히려 에라스무스의 성경과는 달리 비평본문과 같이‘Δαυίδ’ 과 ‘ἔρχου’ 로 되어있다. 또한 홀랜드는 에라스무스가 코덱스 사본 1r 이 아닌 다른 헬라어 사본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1) ‘ἔλθε’ 와 ‘ἔρχου’ 는 다른 철자의 문제가 아니라 형태의 문제이며 (‘ἔλθε’ 는 aorist indicative active 이며 ‘ἔρχου’ 는 present imperative middle/passive) 이러한 형태의 문제가 이 외에도 더 있는데 (아래에 비교를 보시라) 이러한 형태의 문제는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시제를 혼동한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20절의 ‘ἔρχου’ 와 다른 이유는 역시 위에서 설명한 데로 발라의 노트를 그대로 옮겨 사용했기 때문이며; 2) 홀랜드 자신이 이렇게 기록된 사본들을 증거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3) 위에서 설명한데로 홀랜드가 증거로 제시한 사본2049 와 296 은 에라스무스의 성경이 출판된 후의 것이며, 사본 2067 역시 신빙성있는 증거가 될 수 없고; 4)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헬라어 사본에 없는 구절들을 라틴어 사본에서 가져왔다는 에라스무스의 진술이다.
 
여덟째 문단: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서 ‘생명나무’가 아니라…”
홀랜드는 19절에 ‘생명나무가’ 틀린것이고 ‘생명책’이 맞다며 거기에 대한 사본적 증거가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증거로 내세우는 보하릭 역본은 9세기 것이기에 이 논점에 어떠한 무게를 실어주지 못한다. 또한 그가 증거로 제시하는 역본인 라틴 불가타 역시 주요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신약전체를 포함한 가장 오래된 라틴 사본으로서 코덱스 알드마카누스 는 850 AD 것이고, 사도행전과 창세기 그리고 계시록을 포함한 리베르 코미쿠스 는 850 AD 것이며, 계시록만을 포함한 코덱스 하프니아누스 는 550 AD 로서 이 중 유일하게 오래된 역본이며, 나머지 라틴 역본 중 계시록을 포함한 다른 역본들은 1250 AD 의 코덱스 데미도비아누스, 코덱스 디비오넨시스, 그리고 코덱스 기가스 이다. 그러나 “나무”로 적은 사본은 헬라어 사본들 중 א (4세기) 와 A (5 세기)가 가장 오래되었고, 이외에도 10세기 부터 15세기까지의 여러 사본들이 있다. 이뿐 아니리 4세기의 코덱스 할리 (Codex Harley or Codex Harleianus); 10세기 파피루 사본들로는 046, 051, 922, 와 2329; 11세기로는 1006 와 2186; 1611 (10?세기); 1678 (14세기); 1778 (15세기); 1841 (9/10세기); 2050 (1107 AD); 13 세기로는 2053 와2062있다. 이외에도 역본으로는3세기의 사히딕 콥틱, 4-6세기의 라틴 불가타, 5 세기의 알미니안, 필록세니안 시리악 (508 AD), 에티오픽 (500 AD), 7세기의 할클리안 시리악 등 초기의 사본들과 역본들이 숫자적으로 우월하게 있다. 또한 4-5세기의 라틴 불가타에는 libro (책) 가 아닌 ligno (나무) 로 적혀있는데, 이것은 바로 라틴 역본 집필자 또는 에라스무스가  lingolibro로 잘못보고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뿐 아니라,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헬라어 본문과 그후의 본문들을 제외한 그 이전의 모든 헬라어 사본은 ‘생명 나무’로 적혀있으며, 이것은 다른 어느 역본들보다 더 오래된 사본들이다. 그렇기에 사본적 증거는 오히려 ‘책’ 이 아닌 ‘나무’가 옳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홀랜드는 교부인 암브로스와 바키리우스 그리고 프리마시우스와 하이모의 저서에서 “생명 책”이 발견된다고 하면서 그것이 ‘생명 책’이 맞다는 증거로 제시하면서도 그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출처의 원문을 읽은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정확한 출처가 없는 내용을 검증하지 않고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쨋건 그의 주장대로 9세기의 할베르트 시의 (Halberstadt) 하이모 (Haymonis Halberstatensis) 는Expositionis In Apocalypsin Beati Joannis Liber Septem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Volume 117, 1220 페이지) 에서19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홀랜드의 주장대로 ‘생명 책’ (libro vitae) 이라고  하고 있으며, 560 AD 의 하드루메툼 (Hardrumetum) 의 비숍이었던 프리마시우스 (Primasius) 역시 Commentarius Apocalypsin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Volume 68, 934 페이지, B) 에서 ‘생명 책’ (libro vitae) 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 반면에 4세기 후의 바키아리우스 마니쿠스 (Bachiarius Manichu)  는 De reparations lapsi ad Januarium 에서 ‘생명 책’ 이라고 하고 있으나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Volume 20, 1046 페이지) 구체적으로 aut de libro vitae deletes est  (“or deleted out of book of life”, “혹은 생명책에서 지워졌다”) 라고 하고 있으며 19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3장 5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de…deletes est’ 인데, 라틴 역본 22장 19절에는 에는 “~부터 지웠다” 가 아닌 ‘auferet…partem’ (“take away his part”, “그의 참여함/몫을 제거할 것이다”) 이다. 따라서 그의 글은 홀랜드의 주장을 뒷 바침 해주지 못한다. 또한 암브로스 (397 AD) 는 홀랜드의 주장과는 달리 De paradiso (John J Savage 의 “The Fathers of the Church”, Volume 42, 336 페이지) 에서 요한계시록 22:19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생명 책’이 아닌 ‘생명 나무’라고 하고 있다: “If anyone shall add to them […] And if anyone shall take away from these words of the book of prophecy, God will take away his portion from the tree of life (italics mine).” 따라서, 여기서 확실한것은 라틴 교부들의 글 중 가장 오래된 (바키아스를 제외한) 암브로스의 글에 적힌 ‘생명 나무’가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수정: 내가 암브로스의 글은 원문을 보지 않고 역본을 봐서 실수 했음. 역본에는 "생명 나무" (tree of life) 로 되어 있지만, 원문을 보면 암브로스는 de paradiso 에서 "생명 나무"라는 표현을 6번 사용하고 있는데, 딱 한곳에 "생명 책"을 사용하고 있으며 계시록 22:18,19 를 인용했다고 하고 있다: "delebit Deus partem illius de libro vitae." 그러나 이것이 19절을 그대로 인용한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제거하다" 를 뜻하는 19절의 'auferet' 이 아니라 "지우다"를 뜻하는 'delebit' 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auferet' 이 '생명 책'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외적 증거들, 곧 모든 헬라어 사본들의 증거와 암브로스의 증거는 ‘생명 나무’ 가 맞는 것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위에 수정을 포함해도, 'libro vitae' 라는 reading 은 오히려 문제를 제시하지 그것이 맞을 가능성이 낮다. 그렇기에 교부들의 증거들 역시 '생명 책'이 옳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하고 있다.)
 
아홉째 와 열번째 문단: “이제 우리는 또한 내적 증거를 생각해야 한다.…” 와 “한편 생명책이라는 구절은...”
홀랜드는 빌4:3; 계 3:5; 13:8; 17:8; 20:12, 15; 21:27 을 근거로 ‘생명 책’이 맞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몫을 빼시리라” 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빠져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문맥상 옳다고 한다.  우선 20:12 에는 ‘생명 책’이 없다.
 
‘생명 책’이 나오는 모든 구절들을 보면, 그 어느 구절도 하나님의 ‘도시’ 혹은 ‘도성’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계 20:15 절에 ‘불 바다’ 라는 어떤 장소와 연관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생명 나무’는 계시록 세 곳에서 나오는데, 그 구절들을 살펴보면, 2:7절에는 ‘생명 나무’는 ‘내 하나님의 낙원안에 있다” 고 하며 (vitae quod est in paradiso Dei mei); 22:2절에는 '생명의 나무'는 길 가운데 그리고 두 강 사이에 있는데, 1절에 의하면 이 강은 생명수의 강으로서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 부터 나와서" 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고, 곧 그의 성을 의미하고 있으며; 22:14절에는 그 ‘생명 나무’가 문을 통해 들어가는 ‘도시 안’에 (in civitatem) 있음을 암시하며; 22:19 절에도 ‘거룩한 성으로 부터’ (de civitate sancta) 가 ‘생명 나무’와 연관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2:7절의 ‘낙원’ 역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도성’ (civitate Dei) 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생명 나무’는 항상 하나님의 ‘도시’와 연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생명 책’ 은 그렇지 않다. 또한, 만약에 22:14 절에 ‘생명 책’이 옳은 것이라면, 상식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떼어낸다는 의미를 지닌 “제거 할 것이다” 보다는 “지워 버리다” 가 더 맞는 것이 아닌가? 또한, ‘생명 책’과 연관된 모든 구절들을 보면 “제거할 것이다” 나 “빼시리라”와 전혀 연관이 없이 다만 기록되었느냐 않되었느냐 를 논하고 있다. 다만 계 3:5에서만 “지우지 아니하겠다” 라고 하는데, "아니하겠다" 것은 헬라어로 ‘οὐ μὴ’ 두개의 부정어로서 절대 그럴 수 없다는 확고함을 뜻하는 강력한 표현이며, 문맥상 그 반대의 상황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내적 증거는 홀랜드의 주장과는 달리 ‘생명 나무’가 맞다는것을 증거하고 있다.
 
마지막 열한번째 문단: “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 경고는 매우 불길하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와 라틴 성경을 보면, 그 안에서도 빼고 더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러한 논리를 자신이 선호하지 않는 사본과 역본, 그리고 그것을 옹호하는 학자들에게만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학문을 논하는데, 홀랜드는 자신이 증거로 제시하는 학자들과 자료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것 같으며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서 사용한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변증이지 학문이 아니다. 그리고 최종 학자인 하나님을 논하는데, 결국 그는 자신이 학적으로 승리할 수 없기에 믿음으로 정신 승리를 거두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믿음이라는 것이 믿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또는 저렇게 성경을 이해하게 되는데, 성경을 향한 바른 태도의 기준은 도데체 무엇인가? 이미 위에서 설명했듯이 홀랜드는 이 기준 또한 객관적으로 제시할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해 마시라. 소위 공인본문이라는 것과 킹제임스 역본과 달리하는 학자들도 근본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하에서 학적인 연구를 하며, 성서저자들이 기록한 참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저자들의 측근들이 성서 저자의 동의 없이 추가한 부분들, 집필자들이 실수로 또는 본조하기 위해 마진의 노트까지 놓은 부분들, 뜻을 더 정확히 하기 위해 더한 부분들, 그리고 고친 부분 등, 그것들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빼어놓고 오직 성서저자들이 기록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남기려고 인생을 바치는 신앙인들이다. 그러니 비 온전한 지식과 편견에 의해 자신의 주장에 유익한 부분만을 증거로 제시하는 비 정직한 행위를 신앙으로 아름답게 포장하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