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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목사의 사도행전 속으로 10권 과 원어 사용 본문
나는 이재철 목사님이(이후 존칭 생략) 한 일들 곧 시기와 질투에 가득찬 그리고 잘못된 기독사상을 가진 이상한 목사들에게 욕 얻어먹는 행위들을 동영상을 통해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의 토론을 통해 그동안 변호해 왔었다. 그것은 그가 한 일들이 무조건 옳거나 문제가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단”이니 뭐니하면서 물어뜯을 정도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개혁 정신”이라는 것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나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한국이라는 우물을 벗어나면 그 다지 개혁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또한 이름없이 과감한 개혁을 이루어내는 한국의 수많은 용기있는 목회자들에 대해 들어왔기에 그의 개혁을 대단한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식적인 목사님이기에 좋게 보아 왔었다. 그러나 몇일전 우연히 그의 사도행전 속으로 10권을 구글 책을 통해 대충 흩어보고서는 너무나 실망을 했고 이제는 그 문제점들 몇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이재철 목사는 한국의 바른 생각을 가진 많은 신학생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서 장님처럼 그의 문제점 까지도 옳은 것으로 혼동을 해서 모방하는것을 조금이라도 막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점이라는 것은 바로 그의 헬라어 사용인데, 한글로도 충분히 잘 번역이된 부분들을 불필요하게 헬라어를 언급하며 설명을 한다는 것, 또 너무나 황당한 문법적 이해를 근거로 한 원어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가 원어를 얼마나 공부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기초 헬라어 지식으로 원문 주해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기초 문법 역시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년전 한국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어느 목사님의 말이 생각난다. 한국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성서 원어는 엉터리라고 한 것이.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한국에서만 공부한 30대 이후의 목회자들 중 원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을 아직도 본적이 없다. 어쩌면 한국에 성서 원어 문법과 주해에 대한 자료가 너무나 없어서 그런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한국어로된 헬라어 문법책을 보더라도 기초적 헬라어 그 이상을 다룬책을 본적이 없다 (있다면 내게 소개해 주기 바란다.) 특히 주해를 위한 중급 그리고 상급 문법책을 본적이 없다. 그렇기에 이 목사도 당시의 한국 신학교의 헬라어 교육의 문제의 희생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기본 문법 역시 문법이 제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그 문제를 스스로 더 키운것으로 보인다. 어쨌건,사도행전 10 권에서 그가 주해하는 원어 사용의 문제점들 몇가지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이재철: 행 16:1에이스 εἰς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이 목사는 이부분에 대해 “한글 성경에는 ‘루스드라’ 뒤에 ‘에도’라는 조사가 붙어 있어, 바울이 이리저리 다니다가 우연히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들른 것처럼 여겨”지지 만, “헬라어 원문에는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εἰς’가 더베와 루스드라 앞에 각각 붙어” 있기에, 바울이 “처음부터 그 성읍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함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제: 전치사가 방향을 가르킨다는 것은 무엇으로부터의 위치를 가르키는 것이지 목적이나 목표를 지닌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위치를 가르키는 모든 전치사들 역시 위치적 방향을 가르키는 것이지 목적이나 목표를 뜻하지 않는다. ‘에이스’는 “[무엇] 안에” 혹은 “[무엇] 속으로”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목적이나 목표가 아닌 단순한 위치를 가르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그 동네 안으로 들어가셨다” 또는 “그 동네로부터 나오셨다” 에서 무슨 목적을 찾을 수 있겠는가? 목적이라는 것은 전치사 한 단어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장 또는 문맥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헬라어는 단어 하나하나에 모든 뜻을 내포하는 마법적 혹은 영적 혹은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또한 한글 성경에 “… 에도”라는 것은 한글 성경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원어 성경에도 있는데, 접속사인 헬라어 ‘카이’ (καὶ)라는라는 단어가 “… 에도”혹은 “또한”을 뜻하고 있으며, 한글 성경에 “… 에도”로 번역이 된 것이다.원문에는 “Κατήντησεν δὲ καὶ εἰς Δέρβην καὶ εἰς Λύστραν”인데,하자면, “그는 [바울은] 그뿐 아니라또한 데베와 리스트라에도 왔었다…” 이것은 바울이 주의 은혜를 전하는 데있어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행 15:40) 전치사 ‘에이스’ 하나에 목표가 걸려있는 것이아니다. 또한 전치사 ‘에이스’를 두 동네에 사용한 것은단순히 두 곳에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행 14:4, 15:36, 그리고 16:1 후로 전개되는 내용에 의해 더베와 루스드라에 온 것이 어떤 목표에 의한 것이며 우연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지, 그 목표가 전치사 ‘에이스’에 속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전치사는 전치사일 뿐이다.
이재철: 이부분은 헬라어 단어 사용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언어에 관한것이기에 언급한다. 이 목사는 바울에 대해 “누구보다도 헬라어에 능통했기에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4분의 1 이상을 기록할 수 있었고, 누구부다도 히브리어에 능통했기에 헬라어를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라고 한다.
문제: 글쎄다. 누가야 말로 신약 성서 저자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기록을 했으며 헬라어도 바울보다 뛰어나다. 그런데 바울이 누구보다도 더 헬라어에 능통했다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또한 바울이 그 어느 누구보다 히브리어에 능통했다니 그 또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로마인으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태인이 아니었던가?
이재철: 에이미 εἰμί
이재철 목사는 사도행전16장 1절에서 디모데에 대해 그를 “제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소개하고 있다면서, “우리말로 ‘있으니’로 번역된 헬라어의 ‘be’ 동사 ‘에이미εἰμί’”가 미완료형으로서 “반복적 동작을 의미”하기에 “디모데가 한순간에만 예수님의 제자로 산 것이 아니라, 그동안 계속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왔다는 뜻”이라고 한다.
문제: 1절에서 ‘에이미’의 미완료형인 ‘엔’ (ἦν) 은 디모데가 “그곳에” (ἐκεῖ/에케이) “있었다” 는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디모데가 제자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원문에는 ‘καὶ ἰδοὺ μαθητής τις ἦν ἐκεῖ ὀνόματι Τιμόθεος’인데,하자면, “또, 보라, 디모데라는 이름의 제자가 그곳에 있었는데…”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제자이었다”가아니라 “그곳에 있었다”이며,그가 잠시 동안 제자이었는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제자로 남았는지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 다만 바울이 그곳에 갔을 때 디모데라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그곳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며, 그 이상도 또 그 이하의 어떤 의미도 없다. 그리고 미완료형은 단순히 반복적인 동작이나 지속적인 동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진행되었던 것을뜻하는 것이다. (왜 자꾸 과거라는 것을 빼놓고 설명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그 순간의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그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이재철: 파라칼레오 παρακαλέω
이 목사는 ‘파라칼레오’는 바울과 집정관 둘 다사용했지만, 바울이 사용할 때에는“위로하다” 혹은 “권면하다”라는 의미로, 그리고 집정관이 사용할 때는비굴한 “간청”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서, “그 동사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동사의 의미는 이렇듯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한다.
문제: 긍정적인 “위로하다” 혹은 “권면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느냐 아니면 비굴한 “간청”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느냐는동사의 주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무관하게 문맥 곧 상황이 결정하는 것이다. 행 16:15, 27:33 롬등 그 외에도바울이 열 번정도 더 사용한 ‘파라칼레오’ 는 “간청” 혹은 “간구”로 번역이 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만 그 단어가 그렇게 사용된 것은그 단어가 그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의미의사용은 문맥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단어가 어떻게 번역이 되는지에 대한 연구 없이어떤 깊이 있는 가르침을 위해 이처럼 편리한 데로이분법적 해석을 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하다.
이재철: 16:9 환상 '호라마' (ὅραμα)와속 서서
이 목사는 호라마에 대해 "어떤 몽상적인 생강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명료한 비전을 의미합니다. 내용인즉 한 마케도니아사람이 서서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건너와서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을 헬라어 문법에 맞게 번역하면 ‘한 마케도니아사람이 계속 서서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자신들을 도와주기를 계속 간청하였다’가 됩니다. 즉 바울에게 보인 환상은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보인 환상이었습니다.”
문제: 이목 사는 이 구절을 헬라어 문법에 맞게 설명하면 “‘한 마케도니아사람이 계속 서서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건너와서 자신들을 도와주기를 계속 간청하였다’가 됩니다” 라고 하면서 그 문법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데,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쨋건, 이 구절에서“서서”를 뜻하는 단어는 ‘헤스토스’ (ἑστὼς) 로서 완료 분사인데, 정형동사 (finite verb)인‘에이미’의 미완료형인 ‘엔’ (ἦν)과함께 사용되고 있기에 이것을 우언적 (periphrastic) 미완료 분사 라고 부르는데, 과거 완료 (pluperfect) (pluperfect)와비슷하게 보면 되며, 마케도니아사람의 [서 있는]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청하여 이르되”는 두 단어로서 모두 다 현재 분사인데, 미완료형 성격을 지니고 있고, 주동사와 같은 시간에 벌어진 사건 혹은 행동을 뜻하는데, ‘엔’ + ‘헤스토스’가 주동사 역할을하고 있으므로, 마게도냐인이“서있는” 동안 혹은 “서 있는” 상태에서 취한 행동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그가 “서있는” 동안 “청하고” 또 “이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속 서서”는 문법적으로나 표현적으로 바른 표현은 아니다. 다만, 환상이 보이는 당시에 지속적으로 “간청”을 한 것으로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 두 분사와 ‘호라마’라는 단어가 그 환상이“꽤 오랫동안 보인”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호라마’가 사용된 구절들을 보면,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다니엘의 환상을 설명하는 구절들에서 칠십 인역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반복적인 환상이 아니라 한번 보인환상이다. 따라서 ‘호라마'라는 단어 역시 그 환상의 시간이 길었는지 아니면 한 순간의 환상이었는지를 나타내 주고 있지 않다. 다만, 그 환상의 내용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분사가 미완료형 성격을 지녔다고 해서 그 역시 오랜 시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오랜 시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결국에는 무의미한 원어 풀이를 한것이다.
이재철: 16:10하.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이 시간에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인정했다’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가 헬라어 원문에는 1인칭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읍니다. 바울 혼자 그렇기인정한 것이 아니라, 바울 일행이 다 함께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문제: “인정했다”는 단어는 ‘씸/숨/쉼비바존테스’ (συμβιβάζοντες) 로서 현재 분사 복수형이다. 실제로 분사는 복수냐 단수냐만을 나타내지 구체적으로 몇 인칭인지를나타내지 않고, 다만 주동사를 따르는데, “힘썼다”로 번역된 1 인칭 복수형의 동사인 ‘에쩨테싸멘’ (ἐζητήσαμεν)을따라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1 인칭 복수형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 또한 현재 분사 능동태로서 동사적 형용사 역할을하는데, 미완료형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마케도니아로떠나기를 힘쓰고 있던 그 때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바로 마케도니아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셨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미완료형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계속”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번역을 하면서도, 현재 분사에 대해서는 그 형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재철: 16:12 프로토스 πρῶτος
“헬라어 ‘프로토스πρῶτος’는 ‘첫 번째’ 혹은 ‘제일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읍니다.”
문제: 정말 의미 없는 원어 해석이다. 왜냐하면, 원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한글 번역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철: 행 16:34 아갈리아오 ἀγαλλιάω
“아갈리아오ἀγαλλιάω’는 ‘기뻐 날뛰다’, ‘미칠 듯이기뻐하다
는 뜻입니다.”
문제: 이걸 굳이원어로 설명을 해야 하는지모르겠다. 그냥 “크게 기뻐했다” 에는 뛸 듯이기뻐했다는의미가 있다고 한마디 하면 되는 부분이다.
원어의 문제 지적은 직장에서 프로젝트가 많아 시간도 없고 두통도 있고 해서 이즈음 하기로 한다.
어쨌건 한 가지는바로 이 목사가 헬라어가 필요로 하는 부분 역시 다룬다는 것인데, 그 부분은 잘하는 것이다. 문제는 불필요한 헬라어를 남발하는 데있으며, 문법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설명을 한다는데 있으며,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데있다. 그리고 이 글을 끝낼 즈음해서 사도행전 속으로 9 권을 흩어보았는데, 연구는 열심히 하신 것같으나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기에 오점들이 있다는 데있다. (한국에는 학적 서적이나 논문이 부족한 것으로알고 있는데, 이해해 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볼 때에는자신이 읽은 것을비판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지식이라고 생각되는 것은그냥 흡수한 것으로보이는데, 그래서 오점들이 있는 것인지도모르겠다. 내 추측이다.) 괘롭다. 괜찮은 목사님인데. 다만 원문을 제대로 주해할 능력이 안 되어원어에 대한 많은 실수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가 떳떳히책으로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긴 좋은 내용은 많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무분별하게 모델로 삼는 신학생들이 있을 터인데그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해 마시라, 다시 말하지만 설교 내용 중좋은 부분들도 많다. 그런데 원어 사용에 있어서는 아니다. 이래서 내가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이성서 원어를 제대로 연구할 능력이 안 되면강대상에서 원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헬라어는 적어도 22년 반을공부하고 또 주해 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원어를 들먹이며 주해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정말 제대로 하려면 22년 반후에 고급 헬라어와 담론? 분석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한다. 그런데 한국 신학원에서 그 정도의원어를 가르치는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문제는 기초 헬라어만을 공부하고서도 자신들의 원어 실력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목회자들이 많은 것같다. 신학 교수들이 그 문제를 제기 하지 않아서 인가? 어쩌면 원어를 사용해야 좀 있어 보이기에 들그러는지 모르겠다. 이재철 목사님은 원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더 좋은 설교를 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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