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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목사, 이중직은 아마추어! 본문

설교분석/이재철 목사

이재철 목사, 이중직은 아마추어!

frog prince 2023. 6. 28. 09:54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이재철 목사의 설교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어떤 목사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물댄동산교회에서  한 설교 내용이다. 연세가 있으셔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적은 글들이 있는데, 이 설교 후에는 그 글들의 주인공이 이재철 목사임을 밝혔고, 이제는 그의 설교 역시 몇 가지 비판을 하고자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WvEBVphe0YY
 

  • 다음은 이재철 목사에 대한 비판 동영상인데, 태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이다. 비판 자체는 대부분 바른 비판인데, "이재철 목사!" 하면서 위 아래 없이 삿대질하는데, 꼴 사납다. 사역자는 적어도 기본 예의는 있어야 하는데, 그런 예의가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GqI1l7JJmH0
  • 다음은 엠마오 연구소라는 유튜브를 하는 젊은 사역자인데, 이 사역자의 비판과 그의 예의 바른 자세는 본받을 만하다. 나도 본받고 싶은 비판의 자세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멀었다. 꼰대 인생 살기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https://www.youtube.com/watch?v=ZG1c8JkwwtA
  • 다음 역시 생각이 바르고 소신이 있는 청년의 동영상이다. 그런데, 무지한 성도들에게 욕을 얻어먹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iou5aUZfyA

 
우선, 이 목사의 발언 중 동의 하는 부분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1. 15:12  “무슨 50주년 특별 예배 드린다 그러면 대통령이 영상 보내고요. 시장이 영상 보내고요 그 지역 국회의원이 영상 보내고요. 여러분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겁니까?” (이것은 빌리그래햄 부흥집회 50주년 기념 예배를 말하는 것 같은데, 100% 동의 한다.)
  2. 37:03  "무슨 뭐 직장인이든지 경영인 사장이든지, 어떤 직종에 있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자기 아내를 가리켜서 사모라고 합니까?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대학교수가 자기 아내를 가리켜서 사모라고 그럽니까? 재벌 총수가 자기 아내를 가리켜서 이야기할 때 사모가 이렇게 얘기합니까? 목사들만 그럽니다. 사모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높여주는 말이에요 내가 내 아내를 높여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3. 53:40 “오륜교회의 기도회를 온라인으로 틀어서 교인들 기도회하게 하면 그것 교인들 짝퉁 오륜교회 교인 만드는 거 아닙니까? 만약 오륜교회 기도회가 좋아 보인다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나의 고유함으로 거창에 맞는 기도 기도회가 나와야죠."

 
아래는 스스로의 의를 나타내는 발언들:

  1. 16:23: “나는 주님의 교회, 제네바 한인교회, 100주년 기념교회, 평생 30여 년 동안 3번을 목회했는데,한 번도 나는 취임식, 임식을 해본 적이 없고 프랭카드도 걸어본 적이 없다. 그냥 일반 평소 예배하고 똑같이 예배하고 설교하고 나는 떠났다.” (상식과 예의를 중요시하는 분이 왜 “나는”이라고 하며, 왜 반말인가? 목회자들이 자신보다 젊기에?)
  2. 39:06: “저는 30년을 목회하면서 한 번도 제 아내를 사모라고 부른적이 없습니다”
  3. 이 외에도 더 있는데, 찾기 귀찮아서 이 두개만 적는다.

 
이제는 이재철 목사의 설교 내용 몇 가지를 비판하기로 한다.

  1. 이 목사는 목회자로서 프로가 뭔지 아마추어가 뭔지 구분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영상 4:47에서 이 목사는 “오늘날의 젊은 목회자들은 교인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아마추어들입니다”라고 한다. 이중직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선, 왜 이중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인가? 오히려, 겸업이라는 단어가 적합한것이 아닌가? 세상직 역시 그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면, 그곳이 살아있는 목회 현장이요 그 자체 역시 목회이다! 어쨌건, 이 목사가 사용한 “이중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왜 이중직이 아마추어인가? 사도 바울은 텐트 메이커로 일을 했고, 바울의 동역자인 프리실라와 아킬라 역시 바울처럼 텐트 메이커였다. 그들은 자립자족하며 주된 목적 곧 복음 전파를 라는 사명을 감당했다. 돈에 얽매이지 않고 담대히 그리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중직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면 그들 모두 다 아마추어라는 것인가? 특히,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다른 나라로 간 사도들은 이중직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그들 역시 타국에서 생계를 위해 이중직을 가졌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과연 그랬다면, 그들 역시 아마추어인가? 대통령, 의사, 추신수 등, 적합하지 않고 빈약한 예를 들며 이중직을 가진 사역자들을 아마추어라 부르는 것은 생각없는 발언임은 물론 횡포가 아니던가? 아니, 더 나아가서, 성경을 제대로 알았으면, 이중직을 가진 사역자들을 아마추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며, 그런 발언이야 말로 아마추어적인 발언이 아니던가? 그리고 프로는 프로 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목사에게는 과연 프로 의식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2. 이 목사는 8:40에서, “진보적인 기독교 신문에서는 그건 할 수 있다고 다 허락했습니다”라며, 이중직을 갖는 것을 진보와 연관을 시킨다. 그러나, 내가 사는 미국에서는 80년대부터 사도 바울의 이중직을 바탕으로, 세상 일을 하면서 목회를 하는 사역자들을 텐트 메이커라고 불렀고, 그들의 사역의 중요성을 보수 신학교와 보수 교단에서 인정했고, 그러한 이중직을 격려해 왔다. 왜냐하면, 목회 현장의 울타리를 넓혀 교회만이 아닌, 세상의 직장 곧 세상 사람들의 중심에 들어가서, 현실 세계에서 그곳에 적절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이것을 마태복음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중직을 진보와 엮는 것일까? 제대로 알고, 제대로 생각을 깊이 했다면, 과연 그러한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볼때는 자신의 의에 사로 잡혀 깊은 성찰 없이 벌언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3. 목회자로서 프로라는 것은 이중직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로서 프로는 곧 전문성을 뜻한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전문성이라는 것은 바로, 기본적으로 사본비평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하며, 원어성경 주해를 제대로 할 줄 알아하며 (단어 풀이는 주해가 아니다!), 성서해석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성서신학에 대한 지식, 조직신학, 그리고 역사 신학 (종교 개혁뿐 아니라 교부들의 신학 포함)에 대한, 성도들과 차별된 전문적 지식이 있어야 하며, 그 전문적 지식은 바로 학자들의 해석의 옳고 그름을 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뜻한다. 그리고 나서 실천신학이 뒷바침해 준다. 그런데, 자신은 과연 이러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가? 적어도, 사본비평과 원어주해 능력과 성서해석학에 대한 이해는, 그의 인터뷰 내용과, 사도행전 강해와 로마서 강해를 봤을 때, 아마추어라고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또한 신학적으로 깊은 성찰이 없어, 이런 단순 흑백 논리를 펼치고, 미국에서 신학원생 1-2 학년들이 생각하는 정도의 발언과 일을 하면서, 그것을 개혁이라고 오해하는것 아니던가? 그러면서 무슨 프로 의식을 논하는 것인가?
  4. 이 목사는 7:15에서, “목회자는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겁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프로가 되지 않으면 사람의 영혼을 다치게 합니다”라고 한다. 문제는, 이 목사는 프로가 되지 못했기에 깊은 성찰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자신의 짧은 흑백 논리와 상식과 예의를 신학의 깊이와 개혁으로 혼동을 하여 자신의 생각과 방법과 행함만이 의롭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다른 주의 종들에게 상처를 주고, 황당한 원어풀이로 평신도들의 영혼을 다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먼저 살펴야 되는 것 아닌가? 또한, 그의 생각없는 발언은, 생계를 위해 어쩔수 없이 이중직을 하신 많은 목회자들과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이중직을 택하고 또는 생계를 위해 이중직을 할 수 밖에 없는 목회자들에 대한 단순 논리의 휭포이며 폭력이 아니던가? 코로나 바이러스와 기독사에 대한 부족한 지식으로 온라인 예배를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하고, 깊은 신학적 연구와 이해 없이 장로 호칭제나 장로와 목사 임기제를 도입하고, 사도신경의 애매한 부분을 확신에 차 주해하고서, 그것도 자신이 가진 이해가 상식적이고 따라서 개혁적이고 깊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을 출판하여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하는 것들은 아마추어적인 것은 아니며, 그런것들이야 말로 인간의 영혼을 다치게 하는 것은 아니던가?  이 목사의 이러한 소위 “개혁”들은, 카톨릭 교회가 11세기에 성적으로 물란한 성직자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 낸 성직자 독신 규정법 수준이다. (그 시초는 4세기에 있던 엘비라 공회. 그 후로 여러 공회에서...) 성서적이지도 않고, 실천신학적으로도 문제 많은,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들과 성도들의 영혼을 다치게 한, 단순 논리에 사로 잡혀 만들어진 황당한 교회법, 딱 그 수준이다.
  5. 이 목사는 12:14~12:48에서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구절 다들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근데 그 구절만 좋아합니다. 바울이 그 구절 앞에 뭐라고 얘기를 합니까? 주석을 가하자면 나는 정말 가난할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부유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나는 거기에 예속당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 나는 자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 주시더라는 거예요. 여러분 평생 여러분들 먹고사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제일 삶의 목적이 된다면 은 제가 지금 권해드립니다 세속식 갖는게 낫습니다.” 이러한 풀이와 적용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목사는 바울이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 예속되지 않고 자주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능력을 주시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은 이 목사의 주장과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을 뜻하는 단어는 ἐνδυναμοῦντί (엔두나문티)로서 ἐνδυναμόω (엔두나모오)의 현재분사로서 능동태이다. 이것은 바울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살았기 때문에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한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던것은 바로 그것을 능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이며, 순간순간마다, 바로 이시간에 능력 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일 곧 그리스도를 위해 겪는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텐트 메이커라는 이중직을 포함해서. 따라서, 이것은 행함으로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베푸시는 그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주했더니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더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할 능력을 주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자주했기에 능력을 주셨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행위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 받는 핍박으로 인해 굶주리거나 배가 체워지거나 하는 상황을 뜻하는 것이지, 가난과 부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성도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그 범위를 넓힐 수 있겠지만, 바울의 상황과 이 문맥에서의 의도는 가난과 부유가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구절은 사역자의 이중직에 관한것이 아니다.
  6. 바울은 미혼자이었다. 미혼자는 자신만 굶으며 괴로움을 당하면 된다. 그러나 처와 자식이 있는 사역자는 다르다. 자신은 사명에 의해 그렇다 치고, 처와 자식은 왜 남편과 부모의 사명때문에 굶주리고 거지 같이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인가?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하고 있다. 물론, 이 구절은 과부를 돌보는 것에 관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것은 처와 자식을 가진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다. 미국에서는 목사 부인들 역시 일을 한다. 일을 안하면 목회가 않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인은 밖에 나가 힘들게 온갖 잡일을 하는데, 교회에서 말씀 준비하고 기도 한다고 편히 있는 꼴이 과연 한가정의 가장이 해야 할 짖이며, 그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행위인가? 가장이라면, 아내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자신도 파트-타임 (한국의 아르바이트)으로 라도 일을 해야 하며, 미국에서는 실제로 밤에 청소를 하는 박사학위를 소유한 목회자들도 꽤 많이 있다. 요즈음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주로 미국에서 일반 대학을 나와서 신학을 한 사역자들이 많기에, 전공을 살려 전문직과 목회를 함께 하는 목회자들도 꽤 된다. 교회에서 봉급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기도를 백날 해도 동네 인구수와 교회 크기에 의해 한달에 목회자 사례비가 $300에서 $500 밖에 안나오는 미국 교회들도 상당히도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오히려 그는 일을 해서 자신과 가족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닫고 있는 목회자이며, 멍청하고, 게으르고, 악한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90년도에는 목회 10년이면 빚이 수 만불이라는 말이 있었고, 지금은 더 할 것이다. 그런데, 빚만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중직을 하지 않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역자들이 목회만을 하는 사역자로 부르셨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 이 목사는 예의를 논하면서, 42:57에서, “일반 직장에 가면 자동차를 타는 매너 예절은 기본으로 교육받습니다. 그래서 그 자동차 주인이 직접 운전할 때는 상석이 바로 운전석 옆자리입니다 교인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에 목회자가 그 뒷자리에 앉는다 이건 무례한 겁니다”라고 한다. 일반 직장을 다녀야 아는, 유교 사상 곧 계급과 질서를 중요시하는 직장의 예의를 목회자들이 모른단고 탓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직을 가진 목회자는 아마추어라고 하면서, 목회만 하는 목회자가 이걸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이것까지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인가? 물론, 이것까지 안다면 좋은 것이다. 미국에서는 앞좌석이 상석이고, 이것은 일반인들 사이, 친구사이, 직장등 어떤 차이 없이 다 똑같이 적용이 된다. 물론, 리무진을 재외 하고.그리고, 미국의 목회자들은 대부분이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원을 나왔고, 다수의 목회자가 직장 생활을 했거나, 이중직을 가지고 있어 성도들의 세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이중직의 장점이다. 그런데, 이 목사는 신학적 근거에 의한 본질적인 예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장 생활을 했다고, 아니, 홍성사 사장을 했다고, 자신이 배워 알고 지키는 예법을 가지고 훈계를 하는데, 이것은 영적 개혁과 무관하고, 이런것을 젊은이들은, 미안한 표현이지만, 꼰대질이라고 한다. 이 이러한 그의 훈계는 45:06에서 도 계속된다: “여러분, 일반 기업에서도 외부 강사님을 모실 때 실무자가 하지 않습니다 그 대표 CEO 가 합니다. 근데 저는 제가 집회 요청을 받고가지 않는 무조건 가지 않는 첫 번째 교회가 자기 부목사를 시켜서 저한테 요청하는 교회는 가지 않습니다. 그 담임 목사님은 저는 목사님으로 생각되지 않거든요.” 이것의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부목사는 담임목사의 잡일을 하는, 동급 목사가 아니라, 꼬봉이다. 둘째, 따라서, 최고봉인 담임목사가 부탁을 안하고 꼬봉인 부목사를 통해 자신을 초청하는 것은 예의 없는 무례한 행동이다, 그렇기에 이 목사는 그러한 담임 목사를 목사로 생각지 않는다는 것인데, 목사의 기준을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예의와 상식을 기준으로 정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자신이 기분 나뻐 거절하고서는 그것에 대한 예의를 논하며 목사니 아니니 하는 것은 신학이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다. 특히, 그 담임 목사가 부목사를 부리는 목사라고 생각하더라도, 이재철 목사가 진정 주님의 마음을 가졌고 신학적으로 생각을 했다면, 자신에게 연락한 부목사를, 직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자신과 동등한 목사로 인정을 해주고, 초청에 임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스스로 낮아지셨는데, 그런것 가지고 기분 나뻐 거절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초청에 의하고, 교회 안에서의 목회자 계급 구조에 대한 문제를 신학적으로 다루고, 그것에 따라 파생하는 실질적인 문제점들을 고쳐 나갈 방법들을 제시했어야 진정한 신학적, 그리고, 따라서, 성서 중심의 목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생처럼 예의를 가지고 이러니… 은퇴 한 목회자는 조용히 어려운 교회를 돕거나 선교를 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묵묵히 살아야 된다고 미국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이유가, 나이가 먹고 참견을 하기 시작하면 꼰대 성품이 나와서 교회에 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8. 이 목사는 21:03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현존하는 미래가 심방 가서 봉급을 받고 있으면서도 심방하는 헌금을 따로 받으면, 그건 목사님이, 나중에 담임 목사가 되었을 때 교인들에게 공무원들 뇌물 받지 마라 설교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자기가 받는데.” 과연 심방헌금이 공무원들이 받는 뇌물과 같은 것인가? 공무원에게 뇌물을 바칠때는 무엇인가 법을 어겨가면서 얻고자 해서 바치는 것이고, 성도들이 심방 헌금을 하는 것은, 자신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전해주고 축복해주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며, 목회자를 사랑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지, 뭔가를 불법적으로 또는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인간들이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얻을 것이 없는데 누가 정신이 나갔다고 아까운 돈을 목사에게 주겠는가? 물론, 억단위의 연봉을 받으면서도 심방 헌금 챙기는 먹사들은 도둑놈의 심보를 가졌다고 본다. 그런데, 수많은 사역자들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아뢰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심방헌금을, 그것도 정확히 필요한 액수의 돈을 누가 주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통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 도 있는 상황을 가지고 싸 잡아 문제를 삼는 것인가? 참고로, 이런식으로 잦대를 정하자면, 왜 여기에서 멈추는 것인가? 성도가 대접하는 식사나 간식이나 커피는? 성도들이 주는 선물은? 실제로 미국 연방 공무원들은 $10불 이상의 선물이나 상품권이나 식사를 대접 받지 못하게 되어있다. 또한, 그 이상의 가치의 것을 타인에게 줘서도 안된다. 그런데 목회자가 식사 대접 받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도데체 어디까지 되는지 안되는 지를 누가 결정한다는 말인가? 이 목사가 기준인가? 양심에 맡겨야 될일을 예의라는 이름의 율법을 만들어 모든 목회자들을 정죄하고 무시하며, 동시에 그런 목사들에 비해 자신은 프로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던가? 나도 심방 오는 사역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현금을 준적이 있는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감사한 마음과 그 사역자들의 가정을 생각한, 하나님께 감동된 성도들의 순수한 마음의 표현을 뇌물로 몰아가는 것인가?
  9. 어떤 이들은 이 목사의 메세지를 곡해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재철 목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 목사의 메세지를 곡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목사가 생각없이 말을 내뱉어 문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로, 돈을 받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자면, 그것에 대한 문제는 바로 교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돈 봉투를 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과 그 돈에 얽매여 있는 것이 문제이며, 사명없이 목회를 하는 자들과, 후에 돈에 눈이 먼 사역자들은 물론, 부르심이 없이 목회를 하는, 사심에 사로 잡힌 목사들이 문제인 것이지, 성도가 주는 감사와 격려의 표시를 받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고, 교회에서 은퇴할 때 주는 돈을 받는 것 자체 역시 문제가 될 수 없다. 목사는 교회에서 사례비는 물론, 은퇴후 교인들이 생각해서 마련해 주는 소소한 삶의 터전과 은퇴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18절에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은퇴후 갈곳 없고 생계를 이어 나가기 힘든 노년의 목회자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베푸는 교회는 복된 교회이다. 문제는 과하게 돈을 챙기는 상위 1프로의 교회의 목회자들이 문제이지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회하는 사역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 목사가 “돈을 밝히는 사역자들과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 목회를 하려고 하는 젊은 목사들에게”라고 구체적으로 말을 했으면, 전혀 문제가 될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안하는 것 같다. 그냥 독선에 사로잡혀 단순 논리와 이분법으로 모두를 싸 잡어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은, 생계를 위해 매일 주께 부르짖는 목회자들에 비해 돈에 대해 걱정을 해본 적이 없어 보이는데… 다시 말하지만, 이 목사의 메세지를 곡해하는 사람들은 없다. 다만, 이 목사의 깊은 신학적 성찰이 없이 단순하게 통으로 모든 목회자들을 나쁜 놈들로 만드는 발언, 그러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발언들이 스스로를 비판의 도마에 올린 것뿐이다.곡해는, 모두를 싸 잡아 아마추어이며 돈을 밝히는 삯꾼으로 몰아간 이재철 목사가 한 것이다.
  10. 이 목사는 성서적 개혁을 이루고자 힘쓴 목사가 아니다. 동영상 39:14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저는 85년도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37살에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그전까지는 교인석의 교인으로 앉아 있는 거죠. 교인으로 앉아 있으면서 왜 목사님들이 저렇게 할까 생각하는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연찮게, 정말 생각지도 않게 제가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교인석에서 목사님들이 왜 저렇게 하지? 라고 했던 건 절대 하지 않고, 목사님은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던 것은 반드시 하고, 그렇게 30여 년을 목회를 했습니다." 다만, 상식적 예의를 부르짖는 목사일 뿐이다. 물론, 예의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왜냐 하면, 예의와 상식이 없는 목사들을 하도 많이 봐서 가끔식 뒷통수를 때려 주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개혁이라는 것은 신학적으로 그 문제의 원인을 찾아 풀어야 하는 것이지, 상식과 예의의 잦댓을 들여다 대어 훈계를 하며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한 동영상에서 비판할 것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즈음에서 그만하기로 한다.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