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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를 신뢰하라고? (설교의 충분성?) - 역대하 20장 20절, 갈라디아서 1장 6절-10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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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를 신뢰하라고? (설교의 충분성?) - 역대하 20장 20절, 갈라디아서 1장 6절-10절

frog prince 2026. 5. 4. 12:20

오늘 내가 지난 몇 년간 출석한 교회에서 갈라디아서 1:6-10에 관한 설교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몇 마디 적기로 한다. 진짜 목소리를 내야 할 시대적 소명에는 침묵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존심이 긁힌 문제에는 열을 올리며 설교를 한 그 이중성 때문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성결교회이며(이제는 이정도 까지 밝히기로 했다), 이 동네에서 잘 나가는 세 교회 중 하나인데, 모두 다 성결교회이다. 그 세 교회의 담임목사들 모두 SKY대를 졸업하고 서울신대에서 공부한 뒤 미국 신학원에서도 수학한 이들이다. 내가 본 서울신대 출신 목사들의 공통적인 문제점들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루기로 한다.

  • 역대하 20:20 -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개역개정)
  • 갈라디아서 1:6-10 -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개역)

오늘 설교 내용 중 내가 문제를 삼고자 하는 설교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역 사역자들을 무시하고 신뢰하지 않는 일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본인이 여기저기서 들은 말씀들을 토대로 교회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들을 평가하고 무시하는 경우들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래서는 절대로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보내신…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종들을 신뢰하고 따라야 되는 줄 믿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고, 또 우리 목회자들도 그렇고, 실수 많고 또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또 완벽하지 않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ㅇㅇㅇㅇ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주의 종들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해, 우리 목회자들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꼭 필요한 말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말씀을 주고 계셔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충분한 말씀을 주고 계신다는 겁니다. 다른 데서 더 들어야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부족한 말씀 아니에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충분한 말씀 다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주신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게 문제이지, 우리에게 메시지가 부족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주의 종들, 그들이 전하는 그의 메시지들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게 필요해요. 역대하 20장 20절에 보면, 여호사밧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보내준 주의 종들을 신뢰하고 함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어떤 위기의 상황과 어려움이 와도 주 예수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우리가 견고히 서게 되고 형통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보내주신 목회자들,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고 위해서 기도 많이 해주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따져 보기로 한다. (정확히 어떠한 사건이 이 목회자로 이런 설교를 하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1. 왜 다른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안 되는 것인가? 이것은 실력 없는 목사들이 전형적으로 하는 말이다. 신앙이 깊지 않은 교인은 담임목사의 설교만 따라가기도 버거울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을 사랑하고 깊이를 알고자 하는 성도, 특히 분별력이 있는 성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담임이 이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지 못하기에 실력 있는 목회자들의 설교집을 읽고 듣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담임목사가 풀이한 헬라어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며 지식을 넓히려는 것이 잘못인가? 결국 자신의 실력 없음이 탄로 날까 봐 두려운 것 아닌가? 신학적 능력이 부족해 성도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자신의 실력을 키울 생각을 해야지 그러한 성도들을 탓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2. 목사의 설교를 평가하고 무시하면 안 되는가?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도 그것이 성경에 합당한 지 연구했고, 바울은 이를 오히려 칭찬했다. 건전한 신학을 가진 목사들의 설교를 토대로 담임목사의 설교를 분별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물론 분별력 없는 성도가 일방적으로 특정 설교를 맹신하며 담임목사를 무시하는 것은 문제다. 그러나 성도가 얻는 지식의 통로를 이런 식으로 차단하는 것은 잘못된 비판뿐만 아니라 건전한 비판과 검토까지 막는 처사다. 이는 결국 목사의 신학적·도덕적 문제에 대해 권면하고 수정할 장치를 폐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3. 왜 지역 교회의 모든 목사가 '하나님이 보내신 종'인가? 내 친척 중에도 전교조 출신 목사에게 속아 결혼한 사람이 있다. 그자는 하나님이 그가 목회하는 교회로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신학을 공부하여 교회를 공산화하려는 간첩이자 사탄의 종이다. 심지어 이혼 경력과 아들이 있다는 사실까지 숨기고 처녀인 내 친척과 결혼한 악마의 종이다. 그런데 왜 모든 목사를 하나님이 보내신 종이라고 단정하는가? 성도는 목사가 진정 하나님의 종인지 분별할 의무가 있다. 제대로 된 설교나 신학 서적, 혹은 엉터리 해석을 지적하는 정보를 통해서라도 분별하여 목사가 성도들을 잘못 인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4. 담임목사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태도는 독선과 권위주의다. 이러한 발언의 위험성은 성도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멈추고 맹신하라고 강요하는 데 있다. 본인이 실수하는 인간임을 인정하면서도 권위를 앞세우는 것은, 결국 성도를 자기 말 잘 듣는 소나 돼지로 만들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이성을 상실한 채 선동당해 죽어가는지도 모르는 짐승 말이다. 만약 "충분하다"는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면 문제를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방적인 선포는 큰 오해와 위험을 낳는다. 참고로, 정말 설교가 충분하다면 성도들은 굳이 다른 곳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설교가 충분하다면서 왜 외부 강사를 부르고 집회 참석을 독려하는가? 미국의 존 맥아더나 마틴 로이드 존스 같은 위대한 목회자들은 오히려 성도들에게 청교도들의 설교와 건전한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의 설교를 읽으라고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권면했다.
 
참고로, 신앙생활에 충분한 것은 성경이지 목사의 설교가 아니다. 물론 목사의 역량과 상관없이 그 안에서 성도에게 필요한 말씀이 선포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성경의 충분성(Sufficiency)'과 혼동하여 적용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5.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맞춤형 종"은 아니다. 때로는 자격 없는 목사가 부임하는 것 자체가 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다. 말씀의 깊이보다 물질적 축복과 감성적 체험만을 쫓는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그 수준에 맞는 실력 없고 감상주의적인 목사를 보내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목사를 통해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6. 역대하 20:20의 오용.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는 자들이었다. 이들을 현대의 목사와 동일시하는 것은 신학적 비약이다. 본문의 '선지자들(בִּנְבִיאָיו)'은 복수형으로 (칠십인 역에는 ἐν τοῖς προφήταις αὐτοῦ), 참된 선지자로 인정받은 자들을 뜻한다. 이는 거짓 선지자와의 구분을 전제로 하며, 그들의 말이 성취되는가를 통해 분별해야 함을 시사한다. 즉, 무조건적인 신뢰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 우선이다. 열왕기상 22장의 미가야 선지자 사건처럼, 거짓 목사들도 스스로를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라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목사라는 직분이 주의 종이라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더욱더 건전한 신학과 바른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7. 신뢰할 수 없는 자를 어떻게 신뢰하란 말인가?

  • 이 설교자는 2년 전, 자신은 기복신앙을 전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석 달 동안이나 "Claim it!"(긍정의 힘, 기복주의적 선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기복적 설교를 했다. 올해에 이를 정당화하려는 모습에서 정직한 목회자의 자질을 의심하게 되었다.
  • 최근 부임한 부목사는 "구약에서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었다"거나 "사랑이 은사"라는 등 신학의 기초도 없는 소리를 했다. 이런 이들을 어떻게 신뢰하겠는가?
  • 이 설교자가 현재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 부임하기 전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던 초청 강사는 "내가 주님이 되고 주님이 내가 되면"이라는 범신론적 발언을 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존재의 뒤섞임이나 신격화가 아니라 통치와 입양의 개념이다. 이런 자를 강단에 세우는 담임목사를 어떻게 신뢰하는가?
  • 한국 성결교회에서 미국 성결교단 총회에 왔다가 설교를 하러 오신 어느 원로 목사라는 분은 '크라조'(κράζω)를 '크라제'로 잘못 알고 인터넷에 떠도는 잘못된 단어 풀이로 성도들을 선동했다. 과연 신뢰가 가는가?
  • 이 설교자의 설교에는 본문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없다. 실력이 안 되니 매주 비슷한 내용으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런데, 극 소수이긴 하지만, 어떻게 말씀을 갈망하는 성도들을 채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을 하는가? 
  • 말씀의 빈자리를 뜨거운 찬양과 감성적인 반복으로 채우려 한다. 또한, 금요 찬양 모임에는 말씀이 없는데 무엇이 충분하다는 말인가?
  • 동성애 지지자 (혹은 동성애를 인정한 교단의 교회나 그 문제에 대해 애매한 그리고 포괄적인 메시지를 내는 교회에 출석하는, 혹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당과 정부와 법을 지지하는), 상간녀와 결혼을 한 후 목사 안수까지 받은 자, 반하나님의 나라적 사상과 이념 그리고 반국가적 사상을 가진 자들의 곡을 분별없이 매주 찬양으로 사용한다. 기본적인 스크리닝도 못 하는 (안 하는) 목회자들을 어떻게 신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뿐인가? 가사에 '십자가'라는 단어 하나 섞여 있다고 고난주간 찬양으로 적합하다 여기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구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활절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믿어버리는 목회자들...이런자들을 어떻게 신뢰하라는것인가? (이 교회는 담임목사와 부목사들이 직접 찬양을 인도하는 곳이다.)
  • 이 목사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자고 제안한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좌파 성향을 가진 교인들을 의식하는 모양새다. 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두려워하거나, 혹은 소위 공동체의 하나 됨이라는 짧은 신학적 이유 때문에 침묵하는 것으로 보인다. 목사는 인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밥줄 끊길까 봐 전전긍긍해서도 안 되며, 미국 한인교회 수준에서 성장세를 타고 있는 교회에서 쫓겨날까 봐 비겁해져서도 안 된다. 그저 '조용한 교회'라는 허울 아래, '에클레시아'니 뭐니 하는 이상한 수련회와 단기 선교로 갈등을 덮어버리고, 에클레시아에서 얻은 체험자들로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평안과 외적 성장만 탐닉하는 것 같다. (기도와 찬양으로 뜨거움이 있는 교회...이것은 내적 성장이 아니다.) 이런 목회자를 도대체 어떻게 신뢰하란 말인가?

8. 신뢰는 강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뢰는 결코 이런 식의 일방적인 강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과 삶,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친히 입증했다.
 
이처럼 신뢰란 강압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 스스로 정직하고 진실해야 하며, 자신의 실수를 정당화하기보다 겸허히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부단한 연구를 통해 신학적 실력과 분별력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쌓인 실력을 바탕으로 성도들을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하며 신뢰를 구축해 나갈 때, 비로소 성도들은 그 목회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종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신학이 제대로 된 목사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예수님을 신뢰하라고 한다.
 
9. 결론: 성도의 올바른 대응과 분별
나는 처음부터 이 목사의 신학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내 눈에는 그의 신학적 깊이가 얕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파악되었고, 그가 무엇을 도모하려는지 감은 오지만 그것을 애써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인들이 실수를 간혹하는 목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권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마땅한 도리다. 감정적으로 대들거나 삿대질하고 비웃고 무시하는 것은 신앙적인 방식이 아니다. 한두 번의 실수는 너그럽게 모른 척해 줄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실수가 반복된다면, 먼저 기도로 자신의 마음과 목회자의 마음을 준비한 뒤, 사랑과 아끼는 마음으로 권면해야 한다. 만약 그 실수가 신학적·도덕적으로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본인과 목회자, 그리고 하나님만 아는 선에서 덮어주는 지혜도 필요하다.
 
요컨대,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일일이 따지며 목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목사가 부족해도 일반적인 평신도보다는 신학적 지식이 많고, 평신도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을 알고 있기 마련이다. (이 말은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비판해야 할 만큼 중요한 신학적 도덕적 문제는 비판을 해야한다. 그냥 넘어가면 안된다.)
 
그러나 평신도 중에도 드물게 신학적 깊이가 다른 평신도들에 비해 탁월한 이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만약 담임목사의 설교가 도저히 영적으로 충분치 않다고 판단된다면, 인내의 한계가 올 때까지 약 1~2년 정도 그 목회자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보길 권한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나 목회자에게 변화가 없다면, 그때는 자신의 영혼을 올바르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목회자를 찾아 조용히,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현명한 길이다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성도들의 권리이다. 그러나, 오늘 설교 내용은 비판을 받을 만 하다. 어쩌면, 분별력 없는 성도들을 깨우치는 것 역시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결론이 모순 덩어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