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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 "잘못 번역한거죠. 히브리어 제목은 광야에서" 본문
늘 황당한 단어풀이를 하면서, 성경은 틀렸다거나 잘못 번역했다면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며, 성도들에게 성경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그는 민수기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어로 넘버스. 사람을 세었다는 거죠. 그런데요 민수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넘벌스가 아닙니다… 원래 민수기는 “인 더 윌더네스” 광야에서 입니다. 사실 저렇게 번역을 했어야 되는데, 누군가가 민수기를 잘못 번역한 거죠.”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원본에는 제목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제목이 원래 없었을 책들의 제목을 잘못 번역할 수 없다.
둘째,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두 다 그 책들의 첫 문장에 있는 단어를 사용한 제목이다. 다시 말하자면, 제목이 원래 붙어 있던 것이 아니라 첫 문장에 있는 단어로 불리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모세 오경의 모든 책들의 제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창세기는 히브리어 성경은 1장 1절에서 “태초에”를 뜻하는 ‘베레시트’(בְּרֵאשִׁ֖ית)를, 칠십 인 역은(LXX) “근원” 혹은 “창조”를 뜻하는 헬라어 ‘게네시스’(Γένεσις)를, 라틴 불가타는 “창조에 관한 책” 혹은 “기원에 관한 책” 혹은 시작에 관한 책” 혹은 “창세기”를 뜻하는 ‘리베르 게네시스’(Liber Genesis)를 제목으로 사용했다. 2) 출애굽기는 히브리어 성경은 1장 1절에서 “그들의 [아들들의] 이름들”(뵈엘레 쉐못 - וְאֵ֗לֶּה שְׁמוֹת)중 “이름들”(사람들의 이름들)을 뜻하는 ‘쉐못’ 혹은 ‘쉐모트’(שְׁמוֹת)로, 칠십 인 역은 “나오다”를 뜻하는 ‘엑소도스’(Ἔξοδος)로, 라틴 불가타는 “나옴에 관한 책”을 뜻하는 ‘리베르 엑소두스’(Liber Exodus)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3) 레위기는 히브리 성경은 1장 1절에서 “그가 모세를 부르셨다”(뵈이커라 엘-모쉐 - וַיִּקְרָ֖א אֶל־מֹשֶׁ֑ה)에서 “그리고 그는 부르셨다”를 뜻하는 ‘뵈이커라’(וַיִּקְרָ֖א)로, 칠십 인 역은 “레위지파에 속한”을 뜻하는 ‘레비티콘’ 혹은 ‘레위티콘’(Λευιτικόν)으로 (레위지파에 관한 율법), 라틴 불가타는 ‘레위기’ 혹은 ‘레위지파에 대한 책’으로 사용했다. 4) 신명기는 히브리어 성경은 1장 1절에서 “이 말씀들”(엘레 하더바림 - אֵ֣לֶּה הַדְּבָרִ֗ים)에서 복수형의 “말씀”을 뜻하는 ‘하다바림’혹은 ‘하더바림’(הַדְּבָרִ֗ים)을, 칠십 인 역에서는 어원적으로는 “둘째 법” 그리고 사전적 또는 문맥적 의미로는 “복사된 [율]법” 혹은 ‘반복된 [율]법’을 뜻하는 ‘데브테로노미온’ 혹은 ‘두테로노미온’(Δευτερονόμιον)로, 라틴 불가타는 “복사한 [기록한] 법에 관한 책” 혹은 “반복된 [율]법에 관한 책”을 뜻하는 듀테로노미아이’(Liber Deuteronomii)를 제목으로 붙혔다. 5) 따라서, 한자로 “백성을 계수한 기록”을 뜻하는 민수기 역시, 위의 모세의 사경과 다르지 않게, 히브리어 성경은 1장 1절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וַיְדַבֵּ֨ר יְהוָ֧ה אֶל־מֹשֶׁ֛ה בְּמִדְבַּ֥ר סִינַ֖י)에서 “광야에서”를 뜻하는 ‘버미드발’(בְּמִדְבַּ֥ר)로, 칠십 인 역은 속격 복수형의 “숫자의” 혹은 “셈의” 혹은 “합계의” 혹은 “인구조사”를 뜻하는 ‘아리쓰뮈’ 혹은 ‘아리쓰모이’(Ἀριθμοί)로, 라틴 불가타는 “숫자들에 관한 책” 혹은 “계수에 관한 책”을 뜻하는 ‘리베르 누메리’(Liber Numeri)로 번역을 했다. 그렇기에 민수기를 “광야에서”를 뜻하는 ‘버미드발’로 제목을 달지 않고 “계수에 관한 기록”으로 또는 한국어는 “백성을 계수한 기록”을 뜻하는 한자 민수기는 매우 훌륭한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 정리를 하자면, 히브리어는 첫 문장에서의 단어를, 칠십인 역은 주제(테마)를 제목으로 사용했다고 보면 된다. **
넷째, 흥미로운 것은, 미쉬나를 보면, 요마 7장 1절과 소타 7장 7절에서 민수기를 '쉐버카마쉬 하피쿠딤'(שֶׁבְּחֻמַּשׁ הַפִּקּוּדִים)으로 부르는데, "그 다섯째 [다섯권] 안에 있는 계수"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접두사 '쉰'(שׁ)과 '베이트'(ב)를 제외하면 "다섯째" 혹은 "다섯번째"를 뜻하는 '호마쉬' 혹은 '코마쉬'(חֻמָּשׁ)인데, 이 "다섯째"라는 것은 모세 오경의 한부분을 뜻이며, 따라서 '호메쉬 하피쿠딤' 혹은 '코메쉬 하피구딤'을 "[모세]오경에 있는 계수" 혹은 "다섯권책에 있는 계수"라고 번역을 할 수 있며, 모세 오경 곧 다섯권 중 한권을 뜻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계수"를 뜻하는 부분에서 칠십인역의 제목과 같다.
다섯째, 질문은, “광야에서”가 더 좋은 제목인가?이다. 이 질문을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으며, 실제로 “광야에서”가 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광야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제목의 합당함을 판단한다면, 어떤 차원에서는 출애굽기, 그리고 확실히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두를 “광야에서”로 불러야 한다. 따라서, 그런 것을 전제로 민수기가 “광야에서”가 가장 적합한 제목이라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특히 유태인들이 번역한 칠십 인 역에서 민수기를 “광야에서”가 아닌 “계수 기”로 정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인들이 굳이 칠십인 역의 제목들과 다르게 바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 오경의 히브리어 제목들이 제목이 아니라 첫 문장에서의 단어인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광야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모세 오경, 특히 창세기를 제외한 네권이 “광야에서”라는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제목은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보다 성경의 핵심 내용을 그나마 잘 전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섯째, 민수기에 대해 목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영어로 넘버스. 사람을 세었다는 거죠. 그런데요 민수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넘벌스가 아닙니다… 원래 민수기는 “인 더 윌더네스” 광야에서 입니다. 사실 저렇게 번역을 했어야 되는데, 누군가가 민수기를 잘못 번역한 거죠”라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평신도와 다를 바 없는 무식한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주석 한 권만 이라도 읽고 제대로 기본적인 연구만 했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일곱째, “민수기를 잘못 번역한 거죠”라는 발언은, 매우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 목사는 원어를 언급하면서 “성경이 틀렸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언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은 오류 덩어리라고 인식하게 되고, 자신들의 담임목사만 실력 있는 목사로서 성경 번역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신령하고 실력 있는 목사로 우러러보고 추종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적어도 내게는, 그 목사의 설교에서 매우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보이며, 교주 같은 모습이 가끔씩 보인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한국에서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 가는 목회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성도들은 자신들이 추종하는 목사를 신격화하는 한국의 성도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인다. 왜 그럴까?
마지막으로, 왜 신앙생활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라고 주신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그냥 꾸미는 장식품으로만 주신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내용의 설교와 이단들이 가르치는 “새로운” 가르침들과의 차이란 과연 무엇인가? 새롭고 깊이 있고 학적인 설교에 목을 매면서도 결국에는 엉터리 내용을 전하는 목사들과, 새로운 것이라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실력도 안 되면서 무분별하게 그 설교가 좋다고 그러한 목사를 하늘처럼 떠 받드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마귀 정도로 생각하는 성도들… 제발, 하나님이 생각하라고 주신 머리로 생각이란 것을 좀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