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4Today!

파자 해석 본문

설교분석/김성수 목사

파자 해석

frog prince 2015. 11. 6. 13:44

김성수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서 파자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이 있는것 같다. 이중에는 여기저기 강사로 다니는 도은미 사모라는 분도 있고, 그외에도 비슷한 내용의 파자 해석을 하는 글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파자해석을 하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히브리어가 한자처럼 뜻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근거없는 주장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모세 당시 발전되어 온 히브리어 문자는 원하는대로 배열해서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뜻을 지닌 단어가 아니라 단순히 소리를 표시하기 위해 발전되어 온 문자들이다. (참고로: 파자해석하는 분들이 원시내 문자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정당화하려고 하는데, 원시내 문자의 출발은 이집트의 문자에서 시작했는데, 이집트는 이미  표어문자 그리고 그림문자외에 발음표시가 있는 상용문자를 사용했을 당시, 자음을 표시하는 몇개의 그림문자를 가져와 발전시킨 것이 원시내 문자이다. 이것은 바로 뜻을 지니고 있는 표어문자를 가져오거나  그림문자 전체를 가져온것이  아니며  다만 발음에 따라 문자들을 합해서 단어를 만들기에 필요로하는 그림문자들을 몇개 가져와서 발음문자로 발전 시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원시내 문자에서 발전된 히브리어 문자의 뜻을 추적한다는 것은 의미없는 것이며,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 할 근거가 될 수 없다.) 또한 22개의 자음 문자로 되어 있는데, 그것으로 히브리어의 모든 뜻을 담기에는 적은 숫자가 아닌가? 그리고 히브리어 문자의 이름과 상응하는 단어들은 곧 그 단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들을 쉽게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인데, 이것을 두음법 (acrophony) 이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베트’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ㅂ” 소리를 내는 문자의 모양을 쉽게 기억하기 위해서 집 모양을 그려 ‘베트’라고 불렀기에 문자의 이름 ‘베트’가 집이라는 단어와 같은 것이지, 그렇다고 그 문자 자체가 집을 뜻하지 않는다. 만약에 꼭 그래야 된다고 고집을 한다면 문자 ‘베트’가 들어간 성경의 모든 단어를 그렇게 해석해야 일관된 해석이며, 그럴때에는 그 단어와 전혀 연관이 없는 해석을 하게 되는데, 파자를 해석하는 분들을 보면 주로 창세기 1장1절과 요한복음 1장1절에서만 그러한 해석을 할 뿐이지 다른 모든곳에서 일관성있게 그런 해석을 하는 것을 아직까지 들어 본적이 없으며, 간혹 그 창세기 1 장과 요한복음 1장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범위가 매우적으며 한정되어 있고, 그 단어들 역시 한정된 몇개의 단어들만 파자해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범위가 넓게 파자를 하는 분도 있지만, 그 역시 자신들의 해석에 짜 맞추기에 편리한 단어들만 파자를 한다는 것이며, 문자들을 어떻게 파자를 하던지 그 결과는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창세기 1장1절의 단어들을 해석한것과 매우 다르지 않은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자해석은 일관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곧 법칙이 없는 자의적이며 무리한 해석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위에서 설명한 언어의 발전과정과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히브리어 문자를 파자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파자 해석이 가능한 문자가 있는데, 특히 여러 단어가 합쳐져 다른 뜻을 이루는 한자가 그러하며, 더 중요한것은 바로 파자해석이 파자한 단어의 의미와 많이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단어의 파자 해석은 히브리어 단어적 의미 그리고 파자된 문자의 의미와 다른 또는 전혀 다른 뜻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정말 무리가 있는 해석 방법이다.
 
실제로, 파자 해석이라는 것은 미국의 몇 목사들이 김성수 목사님 이전에 이미 했던 것이며, 그들의 해석은 인터넷을 통해 전해져 왔으며 거의 항상 소수의 특정 단어들과 몇 안되는 구절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추측컨데, 김성수 목사님은 (그분이 아니 계시니 확증할 수 없지만) 그들의 해석을 그대로 인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들 중 파자해석을 먼저 시도한 사람은 김성수 목사님이 아니고 교계에서 이단으로 판정된 베뢰아의 김기동 목사인 것으로 알고있다. (아니라면 누구가 먼저 시도했는지 가르쳐 주길 바란다.) 그런데 김성수 목사님 추종자들은 김성수 목사님의 해석이 새롭고 깊이 있고 대단한 해석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으며 파자해석을 비난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무지한 사람들로 몰아가는데, 이러한 파자해석에 대해서는 신학교 히브리어 첫학기나 종교학과 초기에 배우는 것들이기에 신학이나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해석을 하지 않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파자 해석에 문제가 많기 때문이며 본문의 단어들로 구성된 문구와 문장들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어느 주석을 보더라도 파자해석을 하는 기독교 주석을 볼 수 없으며, 특히 교부들에게서 이와 같은 해석을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성서 저자들 역시 구약을 파자 해석 하고 있지 않다. 그뿐 아니라, 파자해석을 한다는 사람들이 하는 해석을 보면 그것은 꼭 파자 해석이 아니라, 히브리어 단어를 편리한데로 쪼개서 합성어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합성어는 우리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파자 해석을 하고 있다고 혼동을 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1:1 의 ‘바라’의 마지막 문자를 떼어 놓고 "아들"을 뜻하는 ‘발’/'바르' 과/와 “소"를 뜻하는 단어와 발음이 같은 ‘알렙’/‘알레프’로 이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파자도 아니고 문법적 해석도 아닌, 어떠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자의적 곧 엉터리 해석이다. 또한, 파자해 놓은 의미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예로,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을 “진리의 하나님이 호흡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령으로 사역하신다 혹은 말씀하신다”라고 해석을 하는데, 정확히 어떻게 그러한 각 문자의 파자적 의미와 복합적 의미가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으며, 파자된 문자의 의미와 그것을 합해서 풀어나가는 해석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파자된 단어들이 복합적으로 어떻게 그러한 해석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이 그것이 맞는 해석으로 단언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창세기 1:1을 파자해석한 내용에 있어서 그 문제들을 먼저 지적하고자 한다.
 
1. 파자해석을 하는 분들을 보면 늘 히브리 알파벳의 첫 문자인 ‘알렢’을 황소와 연관시켜 “하나님”으로 해석을 하는데, 문제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 자신을 금송아지의 형상으로 만들어 숭배한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은 피조물인 "송아지"/"어린 황소" (에겔: עֵגֶל) 로 형상화되는 것을 거부하신것인데, 이는 "소"/"황소" (알푸/알레프) 이기를 거부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며 그는 곧 영이시다. 그런데 왜 문자 ‘알렢’을 계속해서 “하나님”을 뜻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만약에 히브리어 성경에서 ‘알렢’을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 (אֱלֹהִים) 의 약자로서 사용한 사례가 있다면 인정을 하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전혀 그러한 사례를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히브리 알파벳의 첫 문자인 ‘알렢’을 황소와 연관시켜 “하나님”으로 풀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는것이다.
 
2. 히브리어의 ‘엣트’에 대해서도 역시 '알렢'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타브'를 십자가로 설명을 하는데, '알렢'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는 1) 위에서 설명한데로 이며; 2) '알렢'을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의 약자로 보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바로 성경은 '알렢'이 아닌 '알렢'과 '라멛' 두 문자로 만들어진 ‘엘’ 이라는 단어로서 하나님을 뜻하고 있으며; 3) 요한계시록의 “알파와 오메가” 에서 처럼 알파벳의 첫 자인 '알렢'을 은유적으로 하나님으로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구약에서 “처음과 나중” 을 '알렢'과 '타브'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이사야 44:6 에서 “아니(나는) | 리숀(처음이요) | 뵈-아니(또 나는) | 아카론(마지막이다)” (אֲנִי רִאשֹׁון֙ וַאֲנִי אַחֲרֹון) 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은유적으로 '알렢'과 '타브'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실제로 히브리어 문헌에서 그렇게 사용한 사례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구약에서는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엣트'는 하늘과 땅 두 단어 앞에 나오는데, 왜 그것이 두번씩이나 사용되었는지 설명을 하지 않는 것인가? 그뿐아니라 ‘에트’의 ‘타브’ 가 십자가를 뜻하는 것으로서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바로 ‘에트’가 ‘바라’ (창조하다) 뒤에 따르는데, 이는 예수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되는데, 그러면 이단사상이 되는 것이다.
 
3. ‘베레쉬트’의 전치사인 ‘베잍’을 가지고 그것은 “성전 안에 머리가 놓여진 모습”이고 예수님께서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신것은 “성전의 머리이신 예수가 들어갈 수 있는 참 성전이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이신 말씀이 성전 안에 들어가 머리로 존재하는 곳이 교회”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신학을 잘 몰라서 발생한 해석이다. 참 성전 곧 새롭고 영원한 성전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시다. 또한 마태복음 8:19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자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머리둘 곳이 없다라고 하신것은 바로 제자의 도가 쉽지 않다는 것임을 말하신 것인데, 구체적으로 서기관이 자신의 가진 모든것을 버리고 “머리 둘 곳” 곧 잠잘곳도 없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를 수 있겠냐 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 둘 곳”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체 오히려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머리가 되실 교회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석을 하는 것은 무지에 근거한 짜맞추기 해석이며, 교회를 예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4. “창조하다”를 뜻하는 ‘바라’는 끝 문자인 ‘알렢’을 떼고 앞의 두 자음을 가지고 “아들”을 뜻하는 ‘발’/‘바르’라고 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을 하는 분이 있는 방면에, 이것을 ‘베레쉬트’와 같이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라고 하는 분이 있다. 우선 ‘알렢’이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이미 위에서 설명을 했다. 그렇다면 남는 두 자음은 ‘베이트’ 와 ‘레시’가 남는다. 만약 이 두 자음을 따로 파자하거나 두 자음을 합해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발’/‘바르’로 파자하더라도 마지막 문자 ‘알렢’의 문제가 남기에 파자 해석이 불가능해진다.
 
5. 어느 목사는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 (אֱלֹהִים) 을 파자하면 “하나님께서 말로 물 (진리) 을 주다” 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물”이라는 문자 ‘밈’은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물”을 뜻하는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을 하고 있는데, 히브리어에서는 ‘밈’이 물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마임’ (מָיִם)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언어 발전과정을 통해 히브리어에서는 문자 ‘밈’이 “물”의 뜻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쨋건 ‘밈’과 ‘마임’의 발음이 비슷하니 그렇다고 간주를 하자. 그러면, “물”이 어떻게 ‘진리’가 되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설명을 파자해석하는 분들의 글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이집트 상형문자를 찾아봐도 “물”을 뜻하는 문자가 “진리”를 뜻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참고로 “진리”라는 단어는 ‘에메트’ (אֱמֶת) 이다. 또한 어떤이는 ‘엘로힘’을 파자하면 “진리의 하나님이 호흡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령으로 사역하신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 역시 근거 없는 것이 우선 ‘에메트’ (진리) 라는 단어를 파자할 수 있는 문자들이 ‘엘로힘’에 없고, 호흡이라는 단어 ‘네솨마’ (נְשָׁמָה) 나 ‘루앜’ (ר֫וּחַ) 이라는 단어들을 파자할 문자들 역시 ‘엘로힘’에서 발견된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데체 어디서 파자를 했다는 것인가? 나도 모르겠다. 그들의 상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보다.
 
6. 하늘을 뜻하는 ‘솨마임’/‘샤마임’을 “거기에 물이 있다” 라는 뜻이라고 파자해석을 하는데, “물”은 ‘마임’이나 그렇다 치고, 그러면 ‘솨’ 발음의 문자인 ‘쉰’ (שׁ) 은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쉐인’/‘쉰’ (שֵׁן) 은 히브리어로 “이빨”을 뜻하는데, 왜 “이빨”에 대한 해석이 없다는 말인가? 또한 “이것” 과 “있다”는 도데체 어디서 가져온 것인가? 그냥 원하는 해석을 위해 필요한데로 짜 맞춰넣는 것인가?
 
7. 땅을 뜻하는 ‘에렛츠’/‘에레쯔’ (אָרֶץ) 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잡기 시작 하신다”라는 뜻이라고 파자해석을 한다. 그러나 ‘알렢’ (א) 를 가지고 “하나님”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위에서 설명을 했고, ‘뤠시’/‘레시’ (ר) 는 “머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짜데’/‘사데’ (ץ) 는 그 의미가 정확하지 않다. 그런데 왜 파자해석을 하는데도 파자한 문자의 의미와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인가?
 
8. 이와 연관해서 모세 오경 곧 “법”을 뜻하는 ‘토라’를 파자하는데, ‘토라’를 “완성된 소” 곧 “완전하신 하나님” 혹은 “내 안에 완성된 법(토라)”라고 해석을 한다. 그러나 ‘토라’ (תּוֹרָה) 라는 단어를 보면 “소” 또는 “하나님”이라고 파자할 문자 ‘알렢’이 없다. 혹 그렇다고 가정하더라도 도데체 “내 안에” 그리고 “완성된”을 뜻하는 ‘쉘렘’ (שְׁלַם) 이나 “완전”을 뜻하는 ‘탐’ (תָּם) 또는 ‘타밈’ (תָּמִים) 이라는 단어를 파자할 문자가 ‘토라’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토라’를 파자하면서 그 단어의 문자적 의미 곧 “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해석은 온전한 파자도 아니도 온전한 문자적 해석도 아닌, 편리한데로 하는 자의적인 짬뽕 해석이다. 또한, 파자를 하려면 ‘토라’의 모든 자음들을 파자해야 해야 일관성이 있는 파자해석일텐데, 파자해석을 하는 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그럴까? 파자해석을 하는 분들을 보면 히브리어 기초 문법을 벗어나지 못하는것 같고, 또 파자를 제대로 할 능력이 않된다는 것이며, 파자를 하더라도 두음법에의한 해석의 한계가 있기때문이며, 모든 문자를 파자하면서 말이 않되는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9. 위의 모든 파자해석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파자에 의한 결론적 해석이 파자문자들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한 파자방법이나 해석에 있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여러가지의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히브리 단어를 파자해석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다른 단어들을 파자해보기로 한다.
 
1. 창세기에 나오는 첫 인물인 아담 (אדם) 이다.
 

א: 알렢. 소를 뜻하며, 파자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으로 본다.
דם: 담. 피를 뜻한다.

 
이것은 베뢰아의 김기동 목사가 한 것인데, 아담의 ‘아’는 “하나님” 또는 “영”이며, ‘담’ 은 “피” 또는 “생”이라고 하며, “살리는 영”으로서 이 아담은 곧 예수님이라고 한다. 1990년도 전에 베뢰아에 대해 읽은 책에서는 ‘첫째 피’라고 한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해석을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에 ‘아담’이 “첫째 피” 혹은 “살리는 영”이라면, 이것이 신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그것부터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어쨋건, “첫째 피”라고 하니 미국영와 “램보: 첫번째 피” 가 기억에 떠오른다.
 
א: 알렢. 소를 뜻하며, 파자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으로 본다.
ם: 밈. 물을 뜻한다.
ד: 담. 피를 뜻한다.
        
하나님이 물을 피로 만드셨다.
물이 소의 피로 가득했다.
하나님의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하나님은 물과 피를 흘리셨다.
소의 물과 피를 흘려 제사를 드렸다.
 
2. “아들” 또는 “자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벤’ (בן) 이다.
 
        ב: 베트. 셈어로서 집의 모양으로서 집과  같은 소리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ן: 눈. 뱀의 모양으로 뱀을 뜻하는 아람어 ‘눈’ 과 같은 소리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뱀의 집 혹은 사탄의 집. 이 해석을 구약 성경의 ‘벤’이라는 모든 단어에 적용을 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멀리 찾아 볼것 없이 창세기 4:17, 25, 26 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파자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아담과 가인은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 ‘뱀의 집/소굴’ 또는 ‘사탄의 집’ 을 낳은 것이 된다. 그런데 26절에는 그때서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사탄의 자식들이 들끓는 집안때문에 불안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것인가?
 
3. 다니엘서 나오는 “인자와 같은”을 뜻하는 아람어 ‘카발 에노쉬’ (כבר אנש) 이다.
 
            כ: 캐프. 손바닥 또는 손으로 잡음을 뜻한다.
            ב: 베트. 집을 뜻한다.
            ר: 뤠시. 머리를 뜻한다.
 
            א: 알렢. 소를 뜻하며, 파자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으로 본다.
            נ: 눈. 아람어로 뱀을 뜻한다.
            ש: 쉰. 이빨을 뜻한다.
 
전치사 ‘카’ 그리고 아람어로 “아들”을 뜻하는 ‘발’/‘바르’: 아들의 머리를 잡는다.
집의 머리되는 자를 손으로 잡는다.
파자해석하는 분들은 집을 예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집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머리를 잡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의 권세를 쥐어 잡으셨다.
 
“사람”을 뜻하는 ‘에노쉬’:
하나님은 뱀의 이빨이시다.
하나님은 뱀의 이빨을 빼신다.
 
두 단어를 복합시켜서 특정 순서없이 성스럽게 해석을 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은 뱀을 손으로 잡아 이빨을 뽑고 하나님의 집의 권세를 쥔 머리가 되셨다 라고 할 수 있다. 어쨋건 ‘인자와 같은’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건데, 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내용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말이 않된다.
 
아들을 뜻하는 ‘발’/‘바르’ 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8번 나오는데 (스 5:1, 2 (두번); 6:14; 단 3:25, 5:22, 31; 7:13), 그 단어에 이 파자해석을 적용해 보시라. 또한 구약에서 222번 사용되는 ‘에노쉬’ 역시 파자 해석을 적용해 보시라. 정말 황당한 해석들이 나올 것이다.
 
4. “나의 주”라는 뜻의 ‘아도나이’ 이다.
 
            א: 알렢. 소를 뜻하며, 파자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으로 본다.
            ד: 달렛. 문을 뜻한다.
            נ: 눈. 아람어로 뱀을 뜻한다.
 
혹은...
 
            א: 알렢. 소를 뜻하며, 파자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으로 본다.
            דנ: 단. 심판자를 뜻한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문 앞에는 뱀이있으며, 뱀을 지나서 만 하나님께로 갈수 있다.
하나님과 뱀 사이에 문이 있는데, 하나님께로 갈지 뱀에게로 갈지 선택을 잘 해야 한다.
하나님은 뱀을 문밖에 내치셨다.
뱀은 하나님께로 가는 문을 막고 있다.
소과 문과 뱀, 이 셋은 하나이다.
하나님과 문과 뱀은 하나이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
 
혹, ‘눈’ (뱀) 을 광야에서 들린 동으로 만든 뱀으로 본다면, 첫번째 해석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해석이 될 수 있는데, 이것은 내가 생각을 해봐도 정말 괜찮은 해석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 이신데, “주”라는 단어를 항상 위에서 처럼 파자 해석을 할 수 있을까? 또 “주” 를 “뱀”과 연관시키는 것이 적합한 것인가? 어쩌면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파자해석은 그럴듯 하게 보인다.
 
5. “야훼는 나의 깃발” 이라는 뜻을 가진 출 17:15 의 ‘야훼 닛시’ 의 ‘닛시’ (נסי) 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생략하기로 한다.
 
            נ: 눈. 아람어로 뱀을 뜻한다.
            ס: 싸멕. 천막 말뚝을 뜻한다.
            י: 요드. 손 또는 권능을 뜻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빼고 (하나님의 이름 (야훼) 을 파자한다면, 그를 피조물 또는 악으로 표현할 수 있기에) ‘닛시’만을 해석하자면, 뱀은 천막이 비와 바람에 쓰러지 않게 하는 말뚝이요, 권능자이다. 또한 이것은 세 문자로서 뱀과 말뚝과 요드 곧 셋이 하나를 이룬다.
 
                                                                                                        
위에서의 다섯개 만의 예를 보건데, 파자 해석이라는 것에는 해석의 법칙이 전혀 없고, 그 적용에 있어서 문제가 많다. 또한 신학적 그리고 성서 내용적으로도 옳지 않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