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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목사 설교분석 - 산상수훈 25번: 거꾸로 듣는 사람들 (마 5:38-42) 본문

설교분석/김성수 목사

김성수 목사 설교분석 - 산상수훈 25번: 거꾸로 듣는 사람들 (마 5:38-42)

frog prince 2015. 6. 22. 13:06

http://smyrnachurch.com/index.php?mid=SanSangSermons

 

여차저차 해서 호기심으로 고 김성수 목사님의 산상수훈 25번을 듣게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한국의 목회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성도들이 그를 따르고 있으며, 그의 원어 풀이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다. 미국도 또한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복음의 깊은 비밀을 파헤치며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 즈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 그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그가 담임하던 교회는 새로운 목회자가 오기전까지 오랜 기간동안 김목사의 설교 동영상을 보며 예배드리기를 고집해 왔었다. 그것은 김목사외에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분이 없다 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인과 유가족에게는 죄송하지만 틀린것은 바로 잡아야 된다는 마음에 또 할일도 없고 해서 1 시간이 넘는 그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설교 내용중 3분22초에서 14분 1초까지만 글로 옮겨 보았다. 그리고 그가 왜 틀렸는지 머리속에서 가물가물한 원어 문법 지식을 가지고 여기서 부분적으로 지적을 해보았다.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판단하면 될것이다.

 

김성수: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게 동해보복 법이 부분적으로 시행이 되고 있어요…그건 그들이 구약을 문자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성경에 근거하여 그런 벌을 내리고 있는거예요. 이슬람 사람들이 믿는게 알라죠? 그게 알레프, 신 이 예요. 하나님 이예요.

:  글세다. 아랍어 알파벳의 알리프 라면 몰라도 히브리어 알레프는.. 그러나 이건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김성수:  여러분이 살인과 간음과 거짓증거에 관해서 이미 공부를 하셔서 아시겠지만 주님은 그 세가지 말씀을 하실때 시작하실때마다 꼭 붙히는 단어가 있어요. 아쿠오. “너희가 들었다” 이거예요. “너희는 들었지?” 이거예요. 또 어떻게 들었는 지는 몰라요. 하옇든, “너희는 들었다.” 그리고 레우. 그리고 아르카이오스 라는 단어가 - 요 세 단어는 꼭 들어가 있어요. 거기에. 레오는 여러번 설명해 드렸으니까 아시죠. 레마의 동사형이예요. “레마로 말했어.” “내가 말했어.” “옛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어.”

: (1) ‘에레테’ (ἐρρέθη) 는 ‘레오’ (ῥέω; lemma: 레고, λέγω) 의 3 인칭 단수형이기에 예수가 말한것이 될 수 없으며 aorist passive indicative 로 “내가 말했어” (“I said”) 가 아닌 “그렇게 말했던 대로/것처럼” (“it was said”) 혹은 “그렇게 전해졌던 대로/것처럼” 이며, 이것은 사람이 말했다는 것이 아니라 말한 내용 혹은 어떤것을 (it) 가르킨다.  그 전해진것은 “살인하지 말라…” 이며,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로 이해 할 수 있다. (2) 22절에 대조적인 (contrastive) ‘데’ (δὲ) 는 “그러나” ("but") 라는 단어로서 ‘레고’ (λέγω) 라는 단어 앞에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ἐγὼ δὲ λέγω ὑμῖν).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가 말한다” 로 사용한 단어는 ‘레오’가 아닌 ‘레고’ (λέγω) 이다. 그러기에 ‘레오’를 ‘레마’에 비교하면서 그것에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없다. 21절의 3인칭인 ‘에레테’ (ἐρρέθη) 를 1인칭인 “내가 [예수님이] 말했어” 라고 번역하는 것은 전혀 말이 않되지만, 만약 그렇게 번역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과연 21절의 대조적인 ‘데’ (δὲ: “그러나”) 와 1인칭인 ‘레고’ (λέγω: “나는 말한다”) 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3) “그러나” 라는 뜻의 단어는 ‘데’ (δὲ) 외에 ‘알라’ (ἀλλὰ) 가 있다. ‘알라’는 ‘데’ 보다 더 강한 대조적 단어다. 그러면 마태는 왜 ‘알라’가 아닌 조금더 부드러운 ‘데’를 사용한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들었던것이 틀린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신것이었을 것이다. 율법을 파괴하는 예수가 아닌 온전히 세우신 예수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었을 것이다. (4) 또한 1 인칭 단수형 현재분사 능동태인 ‘레고’ (λέγω) 에 앞서 대명사 주격인 (nominative) 에고’ (ἐγὼ: 내가) 를 사용함으로서, 예수님 “자신”을 강조하며 그의 권위/권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5) ‘레오’가 ‘레마’의 동사형이 아니라, ‘레마’가 ‘레오’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서로 다른것이다. (6) 결론적으로, 21절의 ‘에레테’ (ἐρρέθη) 는 절대로 “내가 말했어”가 될 수 없으며, 더더우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니다.

 

김성수:  여기서 ‘옛사람’이라고 번역된 말도,  알카이오스 란 말도, 예전에 제가 엔 아르케, 요한복음의 그 엔 아르케, 태초에 라는 단어 설명해 드리면서, 그게 창세기 1장1절에 베레쉬트와 같은 단어라고 설명해드렸잖아요? 거기서 공부했던 바로 그 단어란 말이예요. 하나님께서 땅에것으로 하늘의 성전을 설명하기 시작하셨다가 베레쉬트 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전에,” “시작부터”, 베레쉬트, “그때부터, 그 보이지 않는 어떤것을 땅에것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그 때부터 너희들에게”, 레우, “말했어”. 그러니까 창세기 1:1 부터 이 계명은 계속있어 왔던 거예요. “내가 말했어.”

: (1) ‘알카이오이스’ (ἀρχαίοις) 는 형용사 (adjective) 이며, 요1:1 의 ‘알케이’ (ἀρχῇ) 는 명사이다. 또한 단어의 어원이 같은 것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동일한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알카이오이스’는 dative (여격) 남성 복수 형이다. 복수 형이며 사람들이나 여러 상황이나 물건들을 가르키는것으로서, 절대로 단수 명사인 태초 (ἀρχῇ) 를 가르킬 수 없다. ‘알카이오이스’ (ἀρχαίοις) 는 dative of indirect object 로서" –에게" ("to") "–를위해" ("for") 를 뜻하며, 같은 남성 복수형 dative 정관사가 ( τοῖς - "토이스) 앞에 붙음으로서 ‘토이스 알카이오이스’ (τοῖς ἀρχαίοις) 는 “예전 사람들에게”로서 (“to the ancients”, “to the people of old times” , “to those of ancient times”; 혹은 “by the people of old” – dative of agency 로 이해할 수 도 있다) 를 뜻한다. 영어로 번역된 “to” 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를 뜻한다. 따라서 태초를 가르키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옛 사람들에게” (복수형) 라는 뜻이다. (2) 또한 요1:1 의 ἀρχῇ 는 모든것의 시작 곧 창조 이전 이지, 하나님께서 땅에 것으로 하늘의 성전을 설명하기 시작한것을 의미 하지 않는다.

 

김성수: 그리고 그 앞에 호티 라는 “왜냐하면” 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요. “내가 말했기 때문에 너희는 들었어” 이거 거든요. 그러데 어떻게 들었냐 하면꺼꾸로 들은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들었으나, 그말은 이거였다”고 지금 주님이 설명해 주는 거잖아요. 지금. 계속해서. 그죠? “너희는 들었어, 내가 시작부터 그렇게 이야기 했기 때문에 그런데 너희는 반대로 듣더라” 죠?

: ‘호티’ (ὅτι) 는 형용사나 명사의 아이디어 혹은 내용을 담은 문구를 소개하는 실사적 보충적 해설의 접속사 (conjunction - substantival epexegetical) 로서 “왜냐하면” (“because”) 이 아닌 “그것” (“that”) 으로 주로 번역이 된다. 이것은 “너희는 들었다”에 대한 대조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너희는 들었다” 에 대한 원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들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원인을 따지는 (causal) “왜냐 하면” 이 아니라 내용 (content) 을 가르키는 “그것” (“that”) 이어야 말이 된다. 따라서 “너희가 들었으나, 그 말은 이거였다” 가 될 수 없으며 “너희는 반대로 듣더라” 는 더더욱이 아니다.

 

김성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어떻게 들었어요? 항상 반대로 들어요.

: 반대로 들었다는 문법적, 문구적, 문맥적, 내용적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보아도 그런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만약 그렇게 이해해야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문법은 물론 내용을 무시한 자의적 해석이며 억지 주장일 뿐이다.

 

김성수: “살인하지 말라”, ‘우 푸흐뉴우’,  이건 “희생제사 드리지 말라”는 거라고 그랬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인의를 담아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면, 사람들은 “희생제사 해” 로 듣는 다고요. 그러니까 구약 내내 희생제사 한것 아니예요. 보세요. “너희는 들었다. 내가 희생제사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들었다는 거예요? “희생제사 해” 로 들었잖아. 그래서 그 밑에 그건 이런 이야기야 라고 설명해 주신거 아니야. 지금 계속해서 그런 방식으로 그렇게 이야기가 내레티브가 진행되어 오고 있지 않습니까?

: ‘우 포뉴세이스’ (Οὐ φονεύσεις) – 부정분사 ‘우’ (οὐ) 는 “…하지마라” (“not”) 이며, ‘포뉴세이스’는 동사 ‘포뉴오’ (φονεύω) 의 명령법 부정과거 능동태 2 인칭 단수형이다. ‘포뉴오’는 일반적으로 생명을 취하는것이 아닌 고의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살인을 뜻하며, 단어가 의미하는 그대로 “너는 살인을 하지 말라” 이다. ‘우 포뉴세이스’ (Οὐ φονεύσεις) 로 번역된 히브리어 ‘로 티라짴흐’ (לֹא תִּֿרְצָֽח) 의 부정분사 ‘로’ (לֹא)와 ‘티라짴흐’ 는 원어 ‘라짴흐’ (רָצַח) 의 칼 (Qal) 미완료 2인칭 단수형으로 구약에서 항상 “살인” 을 뜻하고 있으며, 짐승을 죽이는것이나 희생제사와 연관해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희생제사 드리지 말라”는 해석을 전혀 할 수 없다.

 

김성수: 하나님이 “간음하지 말라”, 우 무이큐오 라고 말씀하시면, 그걸 반대로 듣고 계속해서 엉뚱한 율법의 행위를 내어 놓으면서 세상과 간음하죠? 거꾸로 듣는단 말이예요.

: ‘우 모이큐세이스‘ (Οὐ μοιχεύσεις) “간음하지 말라.” 신약에서는 만큼은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이단어는 부부와의 관계에서 벗어난 타인과의 성적관계를 뜻하며, LXX 에서는 구약에서 주로 부부관계 밖에서의 성적관계를 뜻하며,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김으로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증한 일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이큐오‘ (μοιχεύω) 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나아프‘ (נָאַף) 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문맥상 예수님이 말씀하신것은 부부관계 밖에서의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성적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을 세상과의 간음을 뜻한다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김성수: “거짓 증거 하지마” 우 에피올케오 그러면 오 그래요 이제부터는 참된 증거를 할께요 라고 하면서 열심히 거짓 증거를 하지 않아요? 자기 눈에 보이는건 껍데기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진짜 참된거 이야기 할께요” 그래놓곤 눈에 보이는걸 이야기 하는거예요. 그걸 거짓말 이라고 한다고 그랳잔아요.

: 도데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껍데기는 무엇이며, 참된 증거는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체? 그러면, 그것은 또한 무엇인가? 그리고 거짓말 하는것과 거꾸로 듣는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아무런 설명없이 “이거다” 라고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단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김성수: 그렇다고 그게 나쁜건 아니예요, 여러분. 사람은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 측에서 어떤일을 행하셔야 되는거예요. 그리고 그 일의 결과로 그들의 그 죄, 거꾸로 듣고 하는 그 죄기 오히려 진리로 완성이 되는 거란 말이예요. 하나님이 행하신 어떤 일 때문에. 인간들이 그걸 제대로 알아듣고 제대로 해버리면 않되요. 그럼 피조물 아니지. 하나님 이죠. 하나님 측에서 어떤 일을 하셔야 그들이 원래 그럴 수 밖에 없는 그것이 진리로 완성이 되는 이형구 (?) 이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볼께요.

“살인하지 말라” 의 그 구절을 헬라 원어로 보면, 아쿠오 – “들었다” 예요 – 호티 레오 후 알코마이오스 우 포뉴오 에요.  순서대로 직역을 하면 “너희는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도륙하지 말라고 시작부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너희는 분명히 들었어. 그러니까 하나님은 창세기 1 장 부터 “도륙하지마” 이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너희들 도륙하지마.” “희생제사 드리지마.” “선악과 따먹지마.” 이게 도륙하는거니까. 희생제사 계속 드리는 거니까. 자기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어떤 일을 할려고 하는거. 근데, 그 죽여서 드리는 그 제사 이거는 이 반복하여 드리는 이게 포뉴오 가 가지고 있는 단어의 뜻이니까. 반복하여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죽여서 도륙하여 드리는 제사가 포뉴오 잔아요. “그거 하지마” 가 “살인하지 마” 로 지금 이렇게 번역이 된게 아닙니까?

: 원문에는 “에쿠사테 호티 에레테 토이스 알카이오이스, 우 포뉴세이스” (Ἠκούσατε ὅτι ἐρρέθη τοῖς ἀρχαίοις, Οὐ φονεύσεις) 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왜 “아쿠오 호티 레오 후 알코마이오스 우 포뉴오”라고 읽은 것일까? Root word 를 배열한 것일까? 그러면 원문을 읽지 않고 Strong’s Concordance 번호가 적힌것을 보고 그것에 있는 어원만을 보고 해석을 한것일까? 그리고 형용사인 ‘알카이오이스’ 를 동사인 ‘알코마이(오스?)’ ἄρχομαι(ος?) 라고 읽는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살인하지 말라” 를 “선악과 따먹지마” 와 “희생제사 드리지마” 와 “도륙하지마” 라는 근거 없는 상상력은 어디서 나온것일까? 어쨋건 간에, 한가지 확실한 것은 문법적으로 불가능한 번역을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미 이해 할 만큼 설명을 했기에 더 이상 하지 않고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김성수: 근데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드려요. 희생제사 드려로 듣잖아요. 듣고서 계속해서 희생제사 드리다가 아! 이게 어떻게! 짐승의 제사가 어떻게 나의 죄를 대속을 해! 이게 이 이야기가 아니겠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에 의해 영단번에 드려지는 그 제사, 그 제물, 그것이 나를 살리는 거구나라고 알게 됐어요. 그렇게 알게 되요. 자. 그 죽여서 드리는 제사를 누가 완성해 버려요? 누가 끝내버리죠? 예수님이 자기를 죽여서, 제물로 죽여서 끝내버리죠. 그럼 그 다음 부터 이렇게 해서 이 죽여서 드리는 제사, 우리가 생내적으로 운명적으로 갖고 있는 성향에 의해 요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요런걸 예수님이 완료해 버리셨구나라고 고걸 알게 되는걸 뭐라고 그래요? 진리를 아는걸? 살아난다고 하는거예요. 생명을 얻었다. 산다 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그걸 알고 살아난 사람은 이제 어떤 제사를 드릴까요? 바울이 이야기 하는거. 산 제사를 드린다 말이야. 이제 죽여서 제사 안드린단 말이예요. 살아있는 진리로 살아있는 나를 드리는 거란 말이예요 – 그것이. 그러니까, 그 희생제사를 드리는 거, “살인 하지마” 라고 했을때 그걸 거꾸로 알아듯고 계속해서 도륙하고 희생제사를 하면서. 사도 바울은 그걸 죄라고 그래요. 분명히. 그런데 그걸 통하여 그 진짜 희생제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드리는 제사가 뭔지를 알면, 그게 바로 생명이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것도 악이 아니라니깐요. 그러면 나중에 가서 여러분이 진리안에 탁 들어 앉잖아요? 그러면 이런 마음이 들어. 아! 죄라는 건 원래 없었던 거구나! 위험한 발언인데.잘 생각해 보세요. 집에가서. 이게 무슨 이야긴지. 아! 이게 진리를 위해, 알게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과정속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면, 그 희생제사를 바울이 죄라고, 그게 죄야 라고 반복하여 이야기 하다가, 율법이 죄냐? 라고 이야기 한 이 뜻을 여러분이 알면 되요. 아 그게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과정으로 준비하신 어떤거였다면, 아 원래 없는 거 였구나, 이걸 알게 된단 말이예요. 그랬을때 여러분이도덕과 윤리나 사회법으로 사람들이 규정하고 판단해 놓은 거기에서, 그것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심판하거나 그러지 않을 수 있고, 그 속에 있는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그 잘못 들음과, 아쿠오, 그 잘못 들음과 살아남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어야 되요. 그렇죠? 하나님이 하신 어떠한 일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게 오늘 본문의 내용이란 말이예요. 이 말씀은 레위기에서 인용이 된 말씀이예요. 레위기 24:19 보겠어요.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꺽다예요, 부러뜨리다, 그건 똑같이 부러뜨리래는 거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남에게 손상을 입힌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웃에게 한 그대로 갚아 주겠다고 말씀하세요. 이건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지기 훨신 이전에 있었던 함무라비 법전의 핵심 내용이예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법으로 존재했던 거라니까요. 이게 바벨론의 법이예요. 하나님은 항상 그래요. 사람들이 익숙한 법을 갖고 진리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세요. 그들이 소를 신으로 아니까 그 소를 갖고 신, 나를 설명하죠. 예. 그 소가 나야. 이렇게. 그래서 성경에 소가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할례? 하나님이 명하시기 전에 고대근동에서 이미 다 하던 거예요. 그걸갖고 그게 진짜 뭔줄 알아라 를 설명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