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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는 좌파적 반동이라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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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는 좌파적 반동이라고?

frog prince 2023. 8. 1. 06:05

얼마 전 호서대학교의 이영진 교수의 글을 읽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8008 그는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라는 저스틴 테일러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며, 그러한 주장은 “좌파적 반동에 따른 비평이지 진실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부류로는 핏츠마이어, 제임스 바, 그리고 한국의 차정식과 뉴스앤조이 등이 있다”고 하고 있다. 정말 황당한 발언이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학적 주장에 대해, 그것이 왜 “진실이” 아닌지에 대한 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잘못된 번역과 이해를 바로 잡는 학자들의 주장을 이분법 흑백논리로 “좌파적 반동”으로 몰아가는 것은 과연 신학자의 바른 자세인가? "좌파적 반동"이라는 프레임을 걸고 홍길동을 논하면서 비꼬는 그의 글을 생각하니,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되어 그의 주장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기로 한다.

  1. 이영진 교수는 "'아바 아버지'는 바울과 같은 1세기 초대교회에서 활동하던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 네이티브들 이 도입한 술어”라고 하는데, 문제는, 마태와 누가와 요한이 ‘아바, 호 파테르’ 곧 '아바'와 '호 파테르'를 함께 사용하지 않고 ‘호 파테르’(ὁ πατήρ)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바, 호 파테르’가 유대인들이 도입한 술어라면, 마태와 누가와 요한은 왜 ‘아바, 호 파테르’를 사용하지 않고 ‘호 파테르’를 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마태는 유태인을 위해 복음서를 썻기에 그렇다 하더라도, 바울과 동행한 누가 역시 '아바, 호 파테르'가 아닌 '호 파테르'만을 사용하고 있고, 심지어 바울도 ‘아바, 호 파테르’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한번씩 사용하고 다른 서신에서는 ‘호 파테르’만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호 파테르’가 단순한 ‘아바’의 번역이 아니라 ‘아바, 호 파테르’ 곧 ‘아바’와 ‘호 파테르’가 함께 사용되는 술어라고 한다면, 왜  바울은 꾸준하게 '아바, 호 파테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 중 “아바, 호 파테르’(αββα ὁ πατήρ)를 사용한 마가는, 그 외에 모든 곳에서 ‘아바, 호 파테르’가 아닌 ‘호 파테르’만을 사용했는데, 그것 역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서저자들의 ‘호 파테르’의 사용은 ‘아바, 호 파테르’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도입한 술어라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아바’의 번역어라는 데에 더 힘을 실어주고 있지 않은가? 특히,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아바, 호파테르’는( 마가복음에서 사용된 히브리어/아람어 ‘호산나’, ‘탈리타 쿠미’, ‘엡파타’('에바다'), ‘코르반',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와 그에 따른 헬라어 설명을 볼때) 술어가 아니라, ‘아바’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호 파테르'가 덧 붙혔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2. 이 교수는 “아바 아버지의 원문을 옮겨보면 'Ἀββᾶ ὁ Πατήρ', 언제나 '아바 호 파테르’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 교수는 ‘아바’를 אָב로 철자하고 있는데, 이 교수의 설명과 달리 אָב는 ‘아바’가 아니라 ‘아브’ 혹은 ‘압’인데 (‘베이트’(ב)에 ‘아바’의 ‘바’에 상응하는 ‘아’ 소리의 모음이 붙지 않았다), ‘아브’(אָב)를 ‘아바’(אַבָּא)와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이 교수는 “‘아바’(αββα)는 아람어를 쓰는 유대인의 아바(אָב)를 헬라어 독음으로 덧댄 것으로 보인다”고 하며, “즉 관사 호는 파테르를 명시하고, 아바는 그 관사에 덧씌운 관사적 기능일 것이다”라고 한다. 이부분은 내가 한국어가 짧아 이 교수가 말하는 "아바는 그 관사에 덧쒸운 관사적 기능일 것이다"를 제대로 이해한것인지 모르겠으나 ("...덧댄...", "...덧씌운..." - 정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교수의 이런 주장은 ‘아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바로 ‘아바’(אַבָּא)는 아람어로서 강조적(emphatic) 명사이며, 관사가 붙은 “아버지”(the father)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아브’(הָאָב)에 상응하는 관사가 붙은 아람 명사이다. 따라서, ‘아바’에는 관사가 붙어 있기에 그에 상응하는 헬라어 관사 ‘호’가 따른 ‘파테르’, 곧 ‘호 파테르’(ὁ πατήρ)가 ‘아바’의 뒤를 잇고 있는 것이지, '아바'가 헬라어 "관사에 덧씌운 관사적 기능"이기 때문이 아니다.
  4. 이 교수는 계속해서 헬라어로 번역이 된 ‘파테르’에 관사인 ‘호’가 붙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파테르는 우라노스나 제우스가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하늘 아버지 라는 의미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 유대인 중에서도 우리(바울과 같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는 너희(바울 의 그리스도교와는 적대적인 유대인들 또는 유대교 때가 덜 벗겨진 그리스도인 포함)와 달리, 무서워하는 종의 영 을 받은 게 아니므로 '아바'라 호칭할 수 있다고 구별하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이러한 설명은 왜 하나님을 아람어인 ‘아바’로 불렀는가에 대한 추측적/해석학적 설명이지, 왜 관사인 ‘호’가 사용 되었는지에 대한 문법적/언어학적 그리고 해석학적 설명이 아니다. 또한 관건은 ’아바’가 아버지인가 아니면 아빠인가? 라는 번역의 문제이지, 그 후에 따르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번역의 문제를 해석의 문제로 혼동하는 것인가? 2) 헬라어 ‘파테르’에 관사인 ‘호’가 달린 이유는, 문법적으로, 3 에서 이미 설명한것 처럼,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람어 ‘아바’는 히브리어 ‘아브’와 달리 관사가 붙은 명사이기 때문이다. 3) 바울의 ‘아바, 호 파테르’의 근본은 (구약이외에) 예수님이 하신 ‘아바, 호 파테르’라고 할 수 있는데,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아바, 호 파테르’를 이 교수의 주장대로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 네이티브들이 도입한 술어’라고 가정하자면, 이러한 설명은 말이 않된다. 왜냐하면,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대 땅에서만 사역을 하신 예수님이 “우라노스와 ‘제우스”를 염두에 두고 ‘아바, 호 파테르’를 사용하셨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로 나누어진 상태가 아니며, 예수님의 ‘아바, 호 파테르’는 “적대적인 유대인들 또는 유대교 때가 덜 벗겨진 그리스도인”의 상태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혹 예수님이 로마에 거하셨다면 그럴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겠지만. 물론, 바울이 예수님이 사용하신 의도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적용에 있어서), 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왜 관사가 없는 ‘파테르’를 사용하지 않고 ‘호 파테르’를 사용했는가? 에 대한 설명이나 근거가 될 수 없다.
  5. 저스틴 테일러는 “바울이 '아빠'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면, 틀림없이 그가 알고 있던 그리스어 파파스(papas)나 팝파스 (pappas)를 사용했을 것"이라며 "이 단어야말로 아버지를 이르는 아이들의 언어 파파(papa)나 대디(daddy)를 의미 한다”고 하는데, 이 교수는 이 중요한 주장에 대해서 한마디의 반박도 하고 있지 않고 있는데, 왜 반박을 못하고 있는 것인가? 이 교수의 주장대로 ‘아바’가 “아빠”라면, 왜 성서저자들은 “아빠”를 뜻하는 ‘호 파파스’(ὁ πάππας, ὁ πάπας)를 사용하지 않고, “아버지”를 뜻하는 ‘호 파테르’(ὁ πατήρ)를 사용했는가? 왜 이에 대한 답은 주지 않고 논점과 상관없는 이야기만 하면서 논점을 흐리고 피해가려는 것인가?
  6. 이 교수는 핏츠 마이어와 제임스 바를 차정식과 뉴스앤조이와 함께 언급하면서, 그들과 그들의 주장을 좌파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면, 왜 핏츠 마이어와 제임스 바가 좌파인가? 그리고, 좌파가 주장하는 모든 것은 다 좌파적 반동인 것인가? 영국과 미국에서는 이미 제임스 바의 설득력있는 언어학적 비판과 그 후에 따른 학적인 근거에 의해 ‘아바’는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가 맞다고 지난 수십년 동안 가르치고 있으며, 유명한 보수파 학자들과 보수 신학원에서도 동의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 역시 좌파적 반동이라는 것인가? 이 교수의 이러한 발언은 학적 반론이 아니라, 선동이다. 선동으로 학적 근거 곧 팩트를 덮어 버리겠다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선동으로 팩트를 덮으려는 것이야 말로 좌파들이 잘하는 것 아니던가? 따라서, 이러한 논리로 이 교수의 주장이야 말로 좌파적 반동이라고 몰아간다면, 그는 과연 기분이 좋겠는가? 참고로, 차정식의 글은 자신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제임스 바의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간추려 설명한 글이다.
  7. 이 교수는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 라는 주장에 대해, ‘아바’가 지닌 “시니피에"(기의를 뜻하는 불어, signifié)까지 박탈하자는 것이라고 하는 데, 누가 ‘아바’가 지닌 기의적 의미와 이 교수가 뜻하는 기호적(signe)의미를 박탈하려고 했다는 것인가? 번역 문제에 왜 기의적 혹은 기호적 의미를 가지고 와 논점을 흐리는 것인가? 기의적 혹은 기호적 의미를 논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번역적 의미를 논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 번역적 의미를 논한 후에야 기의적 혹은 기호적 의미를 논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순서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리고 제임스 바의 예레미야스가 제시한 의미에 대한 비판은 언어학적 근거에 의한 비판이지 기의적 혹은 기호적 의미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또한, ‘아바’를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고 제대로 가르치는 학자들의 글과 주석에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본질적인것을 파괴한 것이 있던가? 증거라도 대면서 그 단어의 특별한 의미를 파괴한다고 하면 이해라도 해 줄텐데, 증거없이 말로만 그렇다고 하는 것은 거짓 증거이다. 오히려, ‘아바’를 아빠로 이해하면서 생겨난 해석이야 말로, 20세기의 감성적이고 이질적인 의미이며, 지난 2000년 동안 이해해 왔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던가? 제임스 바와 그외의 학자들의 반론은 그것을 바로 잡는 의로운 학적 작업이었고, 학자들이 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8. 실제로, 예레미아스의 '아바'는 어린 아이의 소리에서 나온 말을 뜻한다는 주장이야 말로,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개념들이 유대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혹은 유대교와 차별화 되어 있음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었다는 인식을 떨쳐내기 힘들며, 따라서 그의 신학은 '아바'에 대한 구약에서의 관점을 무시하고 차별적 이념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과연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기독교가 2000년 동안 이해하고 있던 의미를 박탈한 것이 아니었는가? 특히, 유태인과 관련된 모든것을 제거하려던 나치 정권에 의해 영향을 받은 대학들의 신학과에 남아 있는 반 유대적 이념의 잔재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9. 이 교수의 말대로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과연 위대한 학자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에 반박을 하는 사람들은 그가 위대한 학자임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하고 있고 존경하고 있다. 다만, 새로운 관점의 E.P. Sanders가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가며, 난독증이 있었는지, 그의 주장들을 멋대로 이해하고, 그의 업적을 폄하했다. 어쨋건, 예레미아스는 초기에 ‘아바’는 어린 아이의 소리 (베이비 토크) 라고 했으나, 제임스 바와 그외의 여러 학자들의 비판을 검토한 후 자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아바’는 어린 아이들이 하는 말투 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다. 사실 그들의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예레미야스가 제시한 자료들과 그것들을 풀어내는 과정과 결론에서 언어학적 문제를 발견하고, 예레미야스가 제시한 자료들을 역으로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해 내었다. 따라서, 예레미아스는 그 언어학적 비판에 대해 반론을 내지 못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주장을 내리고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라는 주제로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옳음을 인정하고 받아 들였다. 그런데, 예레미아스도 인정한것을 왜 이 교수가 멀쩡한 사람들을 좌파로 몰아가며 열을 내고 변론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제대로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예레미야스는, 그의 업적을 떠나,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한 위대한 학자이며,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학자의 자세이다.
  10. 이 교수는 “‘아바’는 ‘아빠’이다ᅳ라고 초기에 소개한 학자는 아마도 요아킴 예레미아스일 것이다”라고 추측을 하는데, 미안하지만, 예레미아스는 구체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아바'는 "아빠"이다 라고 한적이 없다. '아바'는 "아빠"라고 한 사람들은, 예레미아스의 '아바'는 어린 아이의 말투라는 그의 주장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 과대 해석해서 퍼지게 된것이며, 제임스 바는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라는 주제의 소논문을 통해 그러한 주장의 원천인 예레미아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펼친것이데, 이것을 가지고 예레미아스가 "'아바'는 '아빠'이다"라고 소개한 초기의 학자라고 하는것은 좀 곤란하다. 예레미아스는, 다만, '아바'는 어린 아이들의 말투라는 개념을 퍼트리는데 있어서 가장 큰 역활을 한 학자인것은 맞으며 (아바: 신약신학과 역사 연구, 1966; 예수님의 기도, 1967; 신약성서 신학, 1971), 그것에는 '아빠'라는 의미가 묵시적으로 함축되었다고 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먼저 제시한 것은 게하르트 키텔의 신학 신약 사전(1933)에 기재되었던 슈렌크의 “파테르, 파트로오스, 파트리아, 아파톨, 파트리코스”라는 주제의 소논문이었으며, 예레미아스가 이를 발전 시킨것이었다.
  11. 학적인 반론은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사람을 좌파와 우파로 몰아가면서 하는것이 아니라, 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하나 하나 따져가며,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저스틴 테일러의 그 어떠한 주장에도 반박을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제임스 바의 언어학적 근거에 의한 반론에도 역시 답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교수는 '아바'가 "아버지"가 아니라는 그 어떠한 언어학적, 신학적, 논리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또 '아바'가 "아빠"라는 증거 역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