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에 있어서, 상대가 오해할 수 있는 빌미를 재공해서는 않된다. 특히, 인터넷상에서의 대화에서는 더더욱이 그러하다.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이라면 그 오해를 쉽게 풀 수 있지만, 인터넷 상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예를 들면, ‘애송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달았다면, 상황에 따라 그것이 자신을 가리킨것이다! 라고 변명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각뿐이고 자신만 그렇게 이해할 뿐이지, 상대가 자신의 머리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는 이상 그것을 이해해주고 예의를 갖춰달라!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이해를 바라서도 않된다. 특히, 자신은 비꼬는 말투를 사용하고, 또 “당신”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말이다. 예의를 바란다면, 오해의 빌미를 제공한 사람이 먼저 예의를 갖춰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말이다. 상대가 오해해서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절대적인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제공한 빌미는 생각지 않고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춰달라는 것은 이중잦대인것 뿐만 아니라, 그것이야 말로 예의가 없는 것이며 기본적 논리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빌미를 제공한 그 이름을 바꾸었어야 한다.
대화에 있어서, 어떤 기본적인 학적 기반이라것이 있다. 학적 기반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학적 공동체가 서로 이해하고 있는 그 기반을 뜻하는 것인데,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가야 하는 것이지, 학적으로 입증이 된 기반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논리를 쌓아 올리면, 대화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 학적 기반에 근거해서 자신의 주장의 전제와 그것에 대한 추론, 그리고 그것에 따른 논리적이고 납득이 될 만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바른 대화의 기본이다. 문맥을 봐야 안다고 하는 전제를 깔고서는 그것과 상반된 추론을 하고, 그 둘과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니다.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학적인 기반과 다른 것이고 올바르지 않은 예시를 들고 나온다면, 상대는 그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개인의 새로운 생각과 주장, 이런것들은 학적 공동체가 검토를 하고 인정을 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상대방이 동의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가 동의를 해주었다고 하더라도, 학적공동체가 입증하고 받아들인 것과 다르다면, 그것은 바른 학적기반에 근거한 올바른 대화가 될 수 가 없다.
대화에 있어서, 상대방이 자신이 제시한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제시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먼저 내놓아야 하며, 상대를 충족시킨 후에야 자신이 주장하는 것에 대한 예시를 통해 설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지적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설득의 노력이 없이 자신의 주장만 늘어 놓으면서, 상대에게 자신의 주장을 고려할 생각을 1%로 도 안한다고 불평을 하며 상대의 인격을 논하는 것은 매우 이기적이며 비합리적이다.
대화에 있어서 논리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처음에 A=B 라고 해놓고서는, 그것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자, 오히려 그 제시한 문제가 틀렸다며 A=C 라고 말을 바꾼다면, 그것은 대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특히, 그러한 자신의 글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이러면, 대화가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대화를 할 가치 조차도 없다.
대화에 있어서 예의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로, 헬라어를 논하는데, 자신이 증거로 내놓는 예시를 원문이 아닌 한국어로 내놓는 것이고, 또, 성경 말씀을 증거로 내놓으면서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그리고 어느 장과 절에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것, 그런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것도, 상대가 그것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계속 한국어로 사용된 예시를 주장하며 자신이 옳다고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고려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대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받아달라고 떼를 쓰는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대화에 있어서,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논의를 하는 사람과는 제대로된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 예를 한가지 들고자 한다. 이것은 원어 강해를 빙자하여 알레고리적 (소위 영적해석) 설교를 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전제인데, 그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어의 특징이 단어 하나 하나에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인데, 헬라어를 신비의 언어, 천상의 언어 즈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생각보다 많은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미국에서는 성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 중 성서 원어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간혹 있는 편인데, 정규 신학원을 나온 사람들 중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목회자들을 정말 찾기 힘들다. 사실, 깊은 의미를 지닌 언어는 헬라어 만이 아니다. 이미 어느 댓글에서 언급을 했지만, 전라도 사투리 중 ‘거시기’는 원톱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 사람이라면 단수로 적었지만 문맥을 통해 감각적으로, 아무런 복잡한 생각없이 이해가 가능한 단수와 복수 형태라는 것이 있고, 주어를 사용하지 않음에도 직감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한국어가 있다. 그외에도 여러 단위의 존칭과 내림말이 있고, 아침식사라는 단어도 상대와 상황에 따라 여러 단어로 표현되는 한국어, 바로 이러한 한국어야 말로 어떤 차원에서는 헬라어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신비스로운 언어라고 할 수 있지 아니한가? 다른 외국어들도 그러한면들이 충분히 있지 아니한가? 헬라어를 무슨 신비스러운 언어로서 문법적 그리고 언어학적인 틀을 초월하는 심오한 언어라는, 이러한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하고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 스스로가 그 잘못된 전제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깨부수지 않는 한에서. 왜냐하면, 제대로된 기반위에 집을 짖는것과 제대로 되지 않은 기반위에 집을 짖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이 네모 반듯하다고 하는 사람과 어떻게 대화가 될 수 있겠는가?